상단여백

자닮 게시판  [ 모두 함께 참여하여 만드는 초저비용농업의 해법! ]

아름다운 손
검은나무 2004-01-02 13:55:34 | 조회: 10697
항아리 두 개를 씻어 뒤뜰에 묻은 때는 지난해 12월 초순이었다. 
삽과 괭이와 곡괭이까지 동원을 했다.
어디가 좋을까 여기가 좋겠구나.
여기를 파도 다른 곳을 또 파보아도 한 두 세 뼘 깊이를 파내려 가기가 무섭게 꿈적도 않는 바위덩어리와 암반이 나왔다. 끙끙거렸다. 전전긍긍했다.
항아리 하나를 묻기에도 이렇게 힘이 들다니.
새로 이사를 한 지리산 자락의 집도 이전 모악산에 살던 곳과 마찬가지로 계곡 옆에 자리잡아 있어서인지 흙보다는 자갈과 바위덩어리가 많았다. 포크레인 생각이 나기도 했다.
툴툴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무력하다니 주저앉아 담배를 태워 물며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겨우겨우 안간힘을 짜내어 항아리 두 개를 묻었다.
항아리 두 개를 묻기 위해 이틀을 보냈다.
항아리 하나에는 이사를 와서 텃밭을 일구고 뒤늦게 뿌렸으나 잘 자라준 무를 뽑아 동치미를 담고 김치가 들어갈 항아리는 비워두었다.
배추씨앗을 뿌려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시기가 너무 늦어 김장김치를 담기에는 속도 채 들지 않았고 그나마 몇 포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빈 김치 독을 묻어두고 나는 자동응답기에 이런 녹음을 남겼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지요. 김장김치들 맛있게 담으셨나요.
뒤뜰에 김치 독 깨끗이 씻어 묻었습니다. 텅 비어 있습니다.
맛있는 김장김치 나눠 먹읍시다. 빈 김장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안녕!"

전주 사는 친구와 선배가, 구례토지의 우리식당에서, 쌍계사 앞 백운장에서,
제철소 다니는 후배 집에서, 그리고 광양 농부형의 김장 일손을 재미 삼아 잠깐 좀 거들었다고 빈 김치 독에 고맙고 따뜻한 김장김치들이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한 포기 한 포기 무를 가꾸고 배추를 키우며 땀 흘리던 손들에 의해, 그 무와 배추를 뽑고 씻어 맛있게 김치를 담았을 정성스런 손길들에 의해, 작으나마 나누어주려는 고운 나눔의 손길에 의해 우리 집 겨울나기 준비는 이제 다 마쳤구나.

동치미와 김장김치가 익어가길 기다리며 짧은 여행이라도 떠났으면 하는 생각 간절해지기도 했다. 유혹의 손길은 순식간에 너무 빨리 뻗어왔다.
이 나라 아픈 질곡들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찍는 조성봉 감독이 집에 찾아와서 보길도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 물어왔다.
몸이 좀 불편해서 당장 따라나서기가 망설여지고 주저되었지만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보길도 행 배를 타기 위해 해남 땅끝에 도착한 시간은 막배가 떠나고도 20여분이 지나버렸다. 보길도에 살며 이쁜 찻집과 민박집을 하는 시인 강제윤의 배려로 캄캄한 밤 강시인의 친구가 쾌속정을 몰고 왔다. 밤배를 탔다. 비좁은 선실에 들어서니 곧바로 눈에 뜨이는 것, 잘 아는 선배의 시집이었다.
좋은 시집을 보시고 있다고 그러니 한때 문학청년이었다는 대답을 하며 한손으로는 방향키를 잡고 한손으로는 밤바다에 조명등을 비춰가며 고개를 연신 선실 문밖으로 내밀고 있던 선장이 뒤돌아보며 웃는다. 웃는 선장의 얼굴이 참 맑고 환하다고 느껴졌다.
종이배처럼, 나뭇잎처럼 배는 밤바다를 질주하며 흔들렸다.
선실 앞 높은 유리창 너머 눈썹 같은 초닷새 달이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어 걱정하지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보길도에 도착했다. 이렇게 수고했으니 그냥 갈 수 없다고 우리는 선장과 함께 마중 나온 강시인의 집으로 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강시인의 아내가 밥상을 차리고 반주를 겸한 몇 잔의 술이 돌았다.
문득 조 감독이 말문을 열었다. 참 일을 많이 한 건강한 손이라며 선장의 손을 가리켰다.



거칠고 투박한 손, 마디마디 옹이가 박인 손, 긁히고 아문 상처자국 즐비한 짧고 굵은 손가락의 손.
그래 그랬었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이상향의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찾아 들어간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하던 어느 술자리에서였던가 밥상머리맡이었던가 문득 상위에 올려놓은 내 하얀 손과 농민들의 거친 손들을 보며 너무도 부끄러워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던 날들이 있었다.
누군가 내 손을 휙 잡아들고 어쩌면 이렇게도 손이 곱게 생겼느냐고 그랬다.
물론 그 말 내게 무안을 주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을 것이다. 겨드랑이 사이로 식은땀이 주루룩 거렸을 것이다. 내 하얀 손, 일하지 않은 손이었다.
고생하지 않은 손이었다.
거친 땀 흘리지 않은 손이었다. 일부러라도 생채기를 내며 손등을 찍고 싶었다.
그 부끄럽던 손의 기억 잊지 않으며 일년을 보냈다.
나무를 하고 밭을 매며 모내기를 하고 논뚝의 풀을 깎으며 내 손은 변해갔다.
언제였던가 나는 또 그런 기억이 있다. 전주의 어느 모임에 갔을 때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의 희고 가는 손을 보며 거칠고 투박하게 변한 내 손을 슬그머니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던 그런 부끄러운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거칠고 투박하나 아름다운 손을 가진 선장은 총각이란다. 틈틈이 시집을 사서 읽는 지금도 문학청년인 맑고 선한 눈매를 가진 선장은 나이 사십이 다 되도록 아직도 결혼을 못 했단다.
농촌뿐이겠는가. 어디 섬 마을뿐이겠는가. 보길도 푸른 바다의 섬에서 소복처럼 희디 흰 동백꽃을 보았다.
보길도, 시름 많아 퍼렇게 멍든 바다의 섬에서 붉은 동백 숲길을 걸었다.
동백꽃 송이송이 절망처럼 뚝뚝 져 내린 붉은 꽃길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 땅끝 마을 전망대 오르는 길옆으로 들어간 화장실 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창문밖에 내걸고 있는 화장실 안에서 나는 해가 바뀔 때마다 바래보는 소망을 중얼거렸다.



거칠고 투박하여 아름다운 손들이 부끄럽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더운 땀을 흘리며 일하는 손들이 환하게 웃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 아름다운 손에 입맞춤하려 저만큼 손짓하며 달려오는
봄날의 꽃 사태 정말이지 꼭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2004-01-02 13:55:34
답변 수정 삭제
목록 글쓰기
게시물 댓글과 답글 2
  • 봄나무 2004-01-02 16:03:43

    헉~~!
    검은나무님 저도 무지 놀랬어요...
    여기서 뵈니 더 많이 반가워요...

    며칠전에 도원이가
    댤걀밥(달걀 껍질에 쌀 앉혀서 밥 짓는)을 언제 해줄거냐고 묻대요...
    아빠가 지리산에 살 때 아빠집에서 해주마고 약속했는데
    그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대뜸 제가 그랬어요...
    시인아저씨네 집에 가면 아저씨한테 해달라 하자..
    아마 그러면 아저씨가 너희들보다 더 좋아라하시며 만들어주실거야..히힛..

    보길도와
    맑고 환한 얼굴의 총각선장님..
    눈물처럼 떨어져 누운 붉은 동백..
    그리고 아름다운 손...

    검은나무님...
    늘...건강 단디 챙기세요...^^
     

    • 들꽃향기 2004-01-02 14:22:07

      검은나무님 놀랬어요.
      드디오 오셨군요. 떡국은..
      수원에 장병용 목사님이 선물을 보내오셨는데요.

      올리실때 html을 선택하셨나요. 아니면 수정버튼에 들어가서 그것을 선택하시구요. 많일 하셨으면 글앞에 <*pre>를 넣어 주세요. *는 빼구요.
       

      번호 제 목 닉네임 첨부 날짜 조회
      공지 후원자 전용 카카오 오픈 채팅방을 개설했습니다. - 2024-08-23 124441
      공지 8월 20일 후원자님들 자닮농장 방문, 뜻깊은 자리였습니다.(사진있음) (54) 2024-05-27 583989
      공지 후원자 분들과 매월 말 줌(ZOOM)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 2024-05-23 488375
      공지 자닮농장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실시간 공개되고 있습니다. (13) 2023-05-19 1824987
      462 쌈쌈쌈이라 하면~~~ (4) - 2004-02-10 10305
      461 떡 드세요~~~((((((((((((((((((((((((((((((((( (12) - 2004-02-10 10588
      460 향기 있는 차 한잔 드시면서 (3) - 2004-02-10 10494
      459 오늘 괴산 자연 농업 학교 다녀왔습니다. (11) - 2004-02-09 11519
      458 자농 당진 사랑방 (4)
      - 2004-02-09 11258
      457 드디어 지리산 새색시 시집을보냅니다. 와와~~ (22) - 2004-02-09 12392
      456 홈페이지 오픈 했습니다 (13) - 2004-02-09 10842
      455 쌈마을님 홈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5) - 2004-02-09 9933
      454 모두 으디로 가셨는지요? (14) - 2004-02-09 10470
      453 숨결님 처방을 ........ (12) - 2004-02-09 10883
      452 좋은 글과 시로 여러분을 초대!! (1) - 2004-02-08 10019
      451 낼이면 2월9일 맛죠.....드뎌 연수를^^ (8) - 2004-02-08 10760
      450 피아산방 이원규 시인님의 MBC심야스페셜2부작을 보시면.. (1) - 2004-02-08 14682
      449 홍양현님 무지 반갑습니다. (3) - 2004-02-08 9975
      448 혼자된 깊은 밤 (Over The Rainbow /Eva Cassidy) (2) - 2004-02-07 10467
      447 버리고 비우는 일..... (1) - 2004-02-07 23363
      446 저는 지금 지리산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6) - 2004-02-06 9559
      445 울라불라왕국님이 오셨어요. (7) - 2004-02-07 9625
      444 자연농업 입문. (5) - 2004-02-06 10312
      443 눈속에 갖혔다.... (9) - 2004-02-06 10167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