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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닮 게시판  [ 모두 함께 참여하여 만드는 초저비용농업의 해법! ]

고추 소주
김홍희 2004-03-19 11:59:20 | 조회: 10391
지리산에 매화꽃이 피었다고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절기마다 시절마다 꽃들은 용케도 순번을 어기지 않고 제 몫을 잘도 해낸다. 매화 필 시절이면 매화피고 벚꽃 필 시절이면 어김없이 벚꽃 핀다.

달맞이 언덕에 작업실을 둔 까닭에 나는 나름대로 꽃구경을 잘 하면서 살아가는 편이다. 송정터널이 뚫린지 오래지만 아무리 바빠도 나는 송정터널을 이용하지 않는다. 시원하게 속도는 내기 좋을지 몰라도 시절이 말해주는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말 그대로 터널이기 때문이다.

입구를 들어서기만 하면 돌아 나올 수도 없고 나가야 할 곳조차 이미 정해져 있다. 중간에 볼 만한 것이 있다고 차를 멈춰 세울 수도 없다. 하기야 요즘 정치판 같은 터널 안에서 뭐 그리 새로 볼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러고 보면 송정 고개 길은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우리의 시절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준다. 겨울 동안 닫고 다니던 차창을 나도 몰래 내리고 있으면, 그 때는 어김없이 봄이 온 것이다.

바람만 싱그럽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연초록으로 움트는 생명의 환희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에서 고개 길로, 고개 길 굽이굽이 온 산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산이 작은 벌레처럼 기어가는 듯 보인다.

이런 날이니 하던 일을 접고 친구를 만나러 지리산을 갔다.

술상을 내어오고 술이 한 순배 돌자 친구는 ‘고추주’를 마셔보았느냐고 묻는다. 고추로 담은 술이냐고 물으니 얼른 술상위에 있던 고추머리와 자루 쪽을 손으로 뚝뚝 따내더니 소주 병 아가리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내 술잔에 술을 붓는데, 한 참을 기다려도 술이 나오지 않는다.

“이거 밤새 술 한 잔 얻어 마시기는 글렀네. 그렇게 속이 꽉 막혀 어디 술이 제대로 나오겠는가?”

내가 던지는 말에 친구는 싱긋이 웃으며 소주병 아가리에 꽂인 고추를 살살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병 속의 술이 고추 속을 타고 잔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탄핵으로 정국이 어수선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술을 병나발 째 들이키고 싶지요 그러면 결국 정치하는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국회나 정가가 냄비처럼 끓더라도 우리는 좀 무덤덤해야 합니다. 언제 그들이 우리를 지켜줬습니까 국민이 국민을 지켰지.”

고추로 막힌 술병은 누군가가 고추를 만져 줘야 술이 나온다. 그래야 나누어 마실 수가 있다. 봄기운에 부푼 폭음을 막을 수 있고, 매운 고추 맛에 요즘 시절 맛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에 꽃구경을 갔다가 고추 술만 마시고 왔다.

천천히, 천천히.

www.kimhonghee.com
2004-03-19 11: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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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댓글과 답글 7
  • 김홍희 2004-03-20 09:56:09

    연지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제 작업실에서도 고추술 한 잔해요.
    지리산에서 야무지게 배워왔거든요.^^

    건강하세요.
     

    • 평화은어 2004-03-20 02:13:28

      그거 전에 발명왕 농부 TV에서 보고 울 신랑이 적극적으로 전파한건데
      거기까지 전해졌군요.
      ㅋㅋㅋ
       

      • 연지 2004-03-19 23:41:09

        저도 꼭 한번 마셔보고 싶네요~
        그것도 저기 보이는 저 손으로 따라주는 그 오묘한 술을 말입니다. ㅎㅎ
         

        • 지리산숨결 2004-03-19 23:29:29

          연지님 고추소주 드셔보셨어요.
          기회를 만드시죠. 저손이 제손입니다요.
           

          • 연지 2004-03-19 23:07:34

            김홍희 선생님, 여기서도 뵙네요^^ 반갑습니다~  

            • 들꽃향기 2004-03-19 15:27:01

              우~~ 하하하~~
              재미있군요...
              고추소주 앞으로 대박입니당~
               

              • 지리산숨결 2004-03-19 11:59:47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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