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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독주조차 허용않는 카오스의 나라
구름나그네 2004-08-13 00:34:04 | 조회: 5060
[그리스이야기<上>] 神들의 獨走조차 허용않는 카오스의 나라

올림픽 계기 '질서' 향하는 아테네
'그리스的인 것' 잃어버릴까 걱정

소설가 이윤기

입력 : 2004.08.12 18:10 38' / 수정 : 2004.08.12 18:18 09'

▲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축제 경기를 창시한 인물은 테세우스다. 이 축제를 기념하는 근대식 경기장이 오늘날의 ‘판아티나이코’다. 이 경기장에는 얼굴이 둘인 헤르마 석상이 있다. 젊은이와 노인의 얼굴이다. 그런데 노인의 성기는 발기해 있는데 젊은이의 것은 축 늘어져 있다. 운동 열심히 하면 노인도 ‘이렇게’ 될 수 있고, 안 하면 젊은이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대극(對極)을 지향하는 그리스적 발상이 아닌가. /사진=이윤기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냥 시골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막 건너온 듯한 그런 시골이었다. 대도시 대구를 처음으로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전구와 라디오와 수도꼭지를 그때 처음 보았다. 무척 억울했다. 나는 대도시 대구의 선진 문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열심히 배웠다.
책을 통해 그리스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심경은, 대구의 문명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와 비슷했다. 아니, 나정(蘿井)에서 박혁거세가 내리고 계림에서 닭이 울기도 전에, 그것도 수백 년 전에 벌써 대리석으로 신전을 짓고, 신들의 모습을 새겼다고 우리가 한문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것도 수백 년 전에 벌써 수십만 행의 서사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것도 수백 년 전에 벌써 문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는 내리막길을 내려와도 한참 내려왔다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기로 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1999년 봄에 그리스 여행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에는 약 4개월을 머물면서 남단 크레타 섬에서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 카발라,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는 타소스 섬까지 고루 누볐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실제로 그리스에는 주인 없는 개가 많다. 국제공항이 지금은 베니젤로스로 옮겨갔지만, 3년 전에만 해도 아테네 근교에 있었다. 대합실에서는 여행객들이 개들과 혼숙했다. 자선 단체에서 소시지라도 들고 와 공항 대합실 입구에다 풀어놓으면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개들이 모여들어 국제공항 택시승합장을 ‘개판’으로 만들었다. 폭염이 유난하던 그해 여름, 나는 냉방이 된 건물은 개들에게 문을 좀 열어주라는 친절한 안내 방송도 들은 적이 있다. 견유철학자 디오게네스의 ‘퀴니코스 비오스(개 같은 삶)’는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남유럽의 불볕더위에, 넉 달 동안이나 카메라 수발을 들면서 만고 고생을 했던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가 그리워.”

그리스는 참 이상한 나라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길을 물으면 자기네들끼리 열심히, 그것도 고성으로 토론하고는 결론을 일러준다. 그런데 가보면 없다. 잘못 가르쳐 준 것이다.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다 답이 다르다. 상당수의 그리스 노인들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십자가를 보면 성호를 긋는다. 그러다가도 내가 사진을 찍느라고 잠시 자리를 뜨면 재빨리 내 아내 옆으로 옮겨 앉고는 수작을 건다. 한두 번 당해본 봉변이 아니다. 독실한 동방 정교회 신자들에게도 살짝살짝 하는 거짓말은 용서가 된단다. 운전기사는 택시요금 바가지를 예사로 씌운다. 그런데도 모두들 무지하게 친절하다. 자신이 베푼 친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발칵 화를 낼 만큼 친절하다.

그리스 말에는 된소리가 많다. ‘아테네’도 내 귀에는 ‘아띠나’로 들린다. ‘테살로니키’는 ‘떼쌀로니끼’로 들린다. 그래서 시끄럽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는 다발총 사격장 같다. 언제나 그렇다. 그런데도 몇 달만 떠나 있으면 또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무수히 드나들었다. 나는 그리스 신화를 풀어 ‘뮈토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신화’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런 내가 상호가 ‘뮈토스’인 술집에서 ‘뮈토스’ 상표 맥주를 마시면서 제목이 ‘뮈토스’인 노래를 듣는 희한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패티 김이 부른, 어느 봄날 그대와 나,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바로 그리스 노래 ‘뮈토스’다. 20세기의 호메로스라고 할 수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기념관에는 내가 번역한 한국어판 ‘그리스인 조르바’가 전시되어 있다. 조르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리스 적으로 혼돈스러운 인물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그리스를 그렇게 좋아하시오 고대 그리스 정신이란 대체 무엇이오 나는, ‘카오스(혼돈)’지요, 하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꼭 ‘창조적 카오스’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스인들은 ‘코스모스(질서)’를 지향하면서도 끊임없이 ‘카오스’ 상태를 조직해낸다. 한 개념의 독주(獨走)는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에서는 신들의 독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천신 제우스가 있으면 저승 신 하데스가 있고, 밝음을 상징하는 아폴론이 있다면 어둠을 상징하는 디오뉘소스가 있다. 현숙한 아테나 여신이 있으면 그 옆에는 음탕한 아프로디테가 있다. 팔난봉꾼 제우스 옆에, 질투의 화신 헤라가 있는 것을 보라. 현철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그 옆에는 소크라테스를 계속해서 놀려 먹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있고 근엄한 철학자 플라톤 옆에는 끊임없이 플라톤을 조롱하는 디오게네스가 있다. 정치도 그랬다. 인기 있는 한 정치가의 독주가 시작되면 그리스 인들은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제)’라는 제도를 통해 그를 추방하고 다른 정치가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2002년 여름 그리스에 갔다. 국제공항이 올림포스에서 베니젤로스로 옮겨와 있었다. 아테네는 3년 전의 아테네가 아니었다. 말끔하게 지어진 국제공항에는 개들이 보이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도 더 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고 했다. 자동차도 더 이상 경적을 빵빵 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이 드디어 횡단보도를 이용한다고 했다. 오토바이 탄 사람들도 더 이상 길 안 비켜주는 승용차의 후사경을 발로 차지 않는다고 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아테네 시가지를 거닐면서 나는 ‘장자’에 나오는 ‘혼돈’을 생각했다. ‘혼돈’이야기는 짧다.

‘혼돈’게는 이목구비가 없다, 혼돈은 친구인 ‘숙’과 ‘홀’에게 매우 친절했다, 어느 날 숙과 홀이, 친절에 보답한다면서 혼돈의 얼굴에 구멍을 뚫어 이목구비를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나는, 올림픽과 더불어 그리스가 ‘그리스적(的)’인 것을 많이 잃어버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매우 비슷하게 변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그리스는 2500년 동안이나 써오던 화폐 단위 ‘드라크마’를 버리고 ‘유로’를 채택함으로써 내가 몇 장 가지고 있는, 아테나 여신이나 아폴론이 찍힌 화폐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리스, 참 그리운 나라였는데 ‘그리스적’인 것을 다 잃어버린 그리스는 그립지 않을 것 같다.
2004-08-13 00: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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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댓글과 답글 2
  • 구름나그네 2004-08-13 20:35:07

    눈돌아가게 해서 죄송함니더...  

    • 노래하는별 2004-08-13 10:35:03

      글수정을 하셨네요 처음에는 눈이 돌아가는줄 알았어요 @@
      덕분에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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