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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것들...
파르 티잔 2004-08-30 17:28:06 | 조회: 4692


<철로는 항상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



나는 지금 태백을 떠나서 대전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태백에서 대전으로 가려면 제천에서 기차를 갈아 타야 한다.

태백에서 청량리로 떠나는 6시19분 기차를 타기 위해 막 숙소를 빠져 나왔을 때 태백에는 안개만 가득했다.

해발 700미터의 천연 휴양소인 태백의 공기는 한 여름 마시는 시원한 냉수처럼 가슴속을 얼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안개 가득한 역사를 빠져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철로 위를 걸어 승강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사북이나 제천으로 또는 서울로 떠나는 아침이 바쁜 태백 사람들이 웅성 웅성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안개를 뚫고 나타날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가 올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사라지고 안개가 사라지는 만큼 기차는 다가왔다.

사방을 둘러 봐도 온통 산뿐인 곳 그곳이 바로 태백이었다.



기차에서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무심히 살펴본다.

출근하는 사람들.. 떠나는 사람들.. 무슨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들.. 가득 태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KTX가 없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은 느리게 가는 곳이다.

태백을 지나고 사북을 지나면서 잠시 졸음에 겨우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어느새 기차는 제천 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제천 역을 내려선다.





<제천 철로 옆 길>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대전으로 가는 무궁화 열차는 1시간 30분이나 후에 제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기다리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제천 역을 빠져 나와 천천히 철로 옆길을 따라 걸어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철길 옆으로 걷는다.

여느 시골 같은 풍경에 빠져 최대한 느린 걸음을 옮긴다.



어떤 수단으로 이동하느냐에 따라 볼 수 있는 시선은 달라진다.

KTX속도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무궁화에서는 볼 수 있고 자가용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자전거를 타며 볼 수 있으며 달리면 보지 못하는 것들은 걸어가면 볼 수 있다.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세상을 보는 넓이는 좁아진다.



<담배가게>



나는 지금 최대한 천천히 걷고 있다.

발 동작 하나에도 어떤 느낌이 있는지 느끼려 노력한다.

길가에 심어놓은 고추 하나, 호박 넝쿨에 붙은 애기 호박과, 막 꽃을 피운 커다란 호박꽃 안에 대가리를 처박고 열심히 꿀을 모으는 벌과 이미 늙어 버린 호박들 까지….

길가를 채우고 있는 민들레, 강아지 풀, 뚱딴지 같은 것들과 아주까리에 관심을 가져 본다.



< 막걸리 병...?>



그러다 낯 선 풍경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추 지주 목에 걸려 있는 막걸리 병 이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새를 쫓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무엇을 위해 막걸리 병을 걸어 놓은 것일까……

궁금해진다..

막걸리 병을 걸어 놓은 이유….



이유가 궁금해진 나는 고추 밭에 거름을 옮기고 있는 노인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것 쇠꼬챙이니까 다칠까 봐 그러지….”

나는 잠시 멍하니 노인에 말에 대해 생각해 봤다.

천천히 정리해 보니 그 요지는 대략 이렇다.

고추를 세우기 위해 철근을 박아 논 그는 철근에 사람이 상할까 봐 막걸리 병으로 주의를 주었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고추 대를 새우기 위해 세워진 지주 목들에는 막걸리 병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 막걸리 병을 세운 그 분>



“할아버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라고 한 마디 하고 돌아 서는데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큰일은 아닌 것 같다.

가슴 깊이 인간에 대한 정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오래 만에 세상이 반갑게 느껴진다.



우리의 가슴에는 이렇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경쟁과 속도를 최고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걸어둔 막걸리 병은 마치 깃발처럼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 하얀 깃발들...>



그것은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비행기로 가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끔은 양심을 포기해도 좋다는 사람들 속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제천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 막걸리 병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자장가처럼 규칙적인 기차가 울림에 빠져 어느덧 즐거운 잠에 빠져 들었다.



여행은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보게 한다.

그것이 어쩌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자유인지도 모른다……
2004-08-30 17: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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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댓글과 답글 4
  • 파르 티잔 2004-08-31 14:40:01

    문사철시서화 멋진 이름입니다.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 듣고 싶네요.
    저는 사실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늘 푸른 유성님 수통골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거기 무슨 산인가..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수통골에 사시는 군요.
    사무실에서 수통골까지는 그리 멀지 않죠.
    늘 푸른 유성님의 글 잘읽고 있습니다.
     

    • 늘푸른유성 2004-08-31 09:21:51

      막걸리 병을 꼿아 놓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고운 마음씨가 묻어나네요.  

      • 늘푸른유성 2004-08-31 09:19:39

        한편의 수필을 읽은 느낌 입니다. 글 참 잘 쓰시네요. 생각도 깊고..
        언제 시간 나시면 우리 앞동네 수통굴에 놀러 오셔서 님들에게 멋진 글과 사진좀 올려주세요. 저는 실력이 없어서...
         

        • 문사철시서화 2004-08-30 22:56:25

          파르티잔님이 올리시는 글, 그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한번 뵐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요?
          세상에 관한, 자연에 관한, 사람들에 관한
          사려 깊고 애정어린 눈길에 많은 공감을 갖게 합니다.

          파르티잔(빨치산)에 관한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저의 이야기도 한 보따리는 되니
          술잔 기울이며 긴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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