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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과 진실을 향한 여행 -아, 체 게바라(Che Guevara)여!'
로망스 2004-09-09 20:54:13 | 조회: 4432
불멸(不滅)의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



1. 탄생과 진실을 향한 여행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 6. 14 ~ 1967. 10. 9

본 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출생지 : 아르헨티나
국 적 : 쿠바
저 서 : 《게릴라전》, 《혁명전쟁 여행》외
추 모 : 1997년 체 게바라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라는
주제로 헌정앨범이 발표되었다.
앨범명 "
El Che Vive! 1967-1997"
속에 수록된 Carlos Puebla가 부른
체 게바라 추모곡 Hasta siempre
(듣기☞)는 특히 남성적 톤의 애절하면서도 힘있는 선율이 인상적이다.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중류층 가정의 미숙아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모두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계급 출신이었고, 무신론자였으며,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웠다.
모두 5남매의 자식을 두었으며, 게바라가 맏아들이었다.

어린시절의 체 게바라 에르네스토는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 천식은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이 천식의 고통이 후에 그를 의사로 만들었고,
병에 걸려 신음하는 민중을 치료하다가, 이들이 걸린 병마보다,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 큰 문제임을 인식하여 마침내,
민중해방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른 위대한 게릴라 전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식에 고통받는 그를 위해 가족들 모두 코르도바
(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간다.
그러나, 천식증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을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으로 배운다.
비록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옷차림도 자유롭고 활달했다. 그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으며, 광적으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후에 그의 이 문학적 역량은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편지와 일기, 연설문 및
저서에서 보여지는 것외에도 회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체 게바라 육성 자작시 낭송 듣기 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에르네스토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反 페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벌써 이시기에 그는 파시즘적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부르조아들의 "부(富)의 독점"
그중에서도 특히, 힘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청년 체 게바라 청년 에르네스토는 특히 여행을 통해서 많은 지식과 견문, 그리고,
후에 혁명을 위한 경험들을 얻게 되는데,
열일곱살 때,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곳을 답사하게 된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의 행동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시만 해도 그는 행동하는 이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려 한 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두살때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지만,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의 부모님들은 불화끝에 1950년에 이혼하고, 그는 어머니와 생활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
에서 한때 사무원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1951년 그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데,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병들고 가난한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눈다. 같은 해 의사시험에 합격하자,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칠레에서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고,
페루의 나환자촌에서는 한동안 봉사활동에 열중했다.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는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여행은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
소중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알 수 있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이러한 소중한 여행으로 인해서 훗날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힘없는 민중은 이미 그의 가족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 중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된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다시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결국 그는 두달만에 흰가운을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는 혁명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2. 일어서는 체 게바라

We are fighting against misery - Che Guevara

볼리비아 라 파스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나게 되는데,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고,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 되어가는 사회개혁 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베네수엘라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관심을 두어 오래도록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좋은 조건으로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자 가디아(Hilda Gadea)와 기거하며,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훗날 쿠바혁명의 둘도없는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의 조직원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1954년 과테말라 중미의 이 작은 나라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면서, 혁신적인 정책을 폈는데, 당시 막강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사
(미국 곡물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인디언과 소농
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는 중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지독한 빈곤상태에 충격을 받고, 아르벤즈의 이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또한,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그는 일생동안 간직한다.
이러한 경외심을 품고, 그는 드디어 혁명의 실천을 위해 패덴드 순켈에 의사로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과테말라의 우익 망명인사인 호세 카스틸료 아르마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고 군대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CIA의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헐벗고 굶주린 민중을 철저히 파괴하는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막스-레닌에 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범죄에 정면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로 마음 먹는다.

마침내,
"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이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의 청년은 후세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
스트인 진정 위대한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다시 태어났다.
"
체(Che)"는 스페인어로 "오!", "어이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친숙과 존경을 표현하는 호칭이다.
하지만, "
게바라"""가 붙으면 그 의미는 엄청난 것이 된다.
"
체 게바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 바로 격동의 60년대를 온몸으로 뜨겁게 살다간 가장 완성된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실천하는 이성이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인터뷰가 있어 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현재는 행방불명이 된 아르헨티나의 신문기자 호르헤 리카르도 마셋티와의 대화이다.

"나는 아르벤즈 정부의 요직에 앉을 생각은 전혀 없소.
명백한 정치경제적인 침략을 자행한 미국과 미국자본의 횡포에 덩달아 날뛰는 반민족적인
매판자본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군대를 조직하려 했을 뿐이요.
과테말라는 지금이야말로 투쟁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소."

미국 CIA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간섭했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가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선교사를 앞세운 미국식 민주주의란 것을 통해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갔다. 과테말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아르벤즈는 피신할 틈도 없었다.
과테말라 쿠테타는 시작되자마자 어이없이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게바라는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투쟁을 촉구하기도 하고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미 CIA의 사주를 받은 과테말라정부의 재판부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공고하였기 때문에, 게바라는 과테말라인 친구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 시티로 도피한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게바라와 파토호는 어미잃은 새처럼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 역경을 혁명이론과 마르크스주의,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두루 연구하는 기회로 삼는다.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독서를 통해 게바라는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3. 혁명의 시작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이 되자!
- Che Guevara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 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 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
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년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
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
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었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라카로운 빛을 띤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
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깥은 가시가 돋혀있어서
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뜨듯미지근한 고기국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수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과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
지만...
장비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
12월 5일 바티스타군은 그들이 숨어있던 알레그리아
델 피오라는 사탕수수 재배지역을 습격했다.
사탕수수밭에서 140명에 달하는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전사하고, 게바라를 포함하여
다수가 부상당했다.
대다수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버려 생사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과 바티스타가
두목인 1만 2천여 용병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전 속에서 단련된 장교들과 네이팜탄을 비롯하여 무엇 이든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전투기, 게다가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바티스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제국주의.....
이 모든 것들과 소수 게릴라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4. 최초의 승리와 산타 클라라 대첩

We will not allow another Cuba - Che Guevara

1956년 1월 16일 살아남은 대원들은 본격적으로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1957년 라 플라타 병영 습격을 성공하므로써 게바라는 첫번째 승리를 이루었다.
이 역사적 승리를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전쟁의 회고]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 플라타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승리의 전과는 약 36명의 바티스타군을 22명의 게릴라
부대가 습격, 라 플라타 병영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을 이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쿠바 국내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이 국민들에게 더 이상
게릴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뉴욕 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라는 기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에 들어가 카스트로와 회견을
했다(1957년 2월 17일).

사진까지 곁들인 이 회견기사는 정부측 주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TV로 방영되었다.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산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체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했다.
"열악한 조건이었다.
의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산속의 환자는 모두 비슷한 증세로 앓고 있었다.
이빨이 몽땅 빠져버린 노인, 기생충이나 구루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
여러가지의 비타민 결핍증, 이 모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농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었다.
나는 단순한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조건 자체를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57년 6월에는 치과의사로도 개업했다.
내가 진료한 첫환자는 이스라엘 프라도였다. 그는 완전히 나아서 돌아갔다.
두번째 환자는 호엘 이글레시아스였는데, 그의 충치를 뽑기 위해서는 이빨에 맞춘 치료용
화약이 필요했다.
그건 일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이빨은 그대로 남아 잇몸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뽑아내려고 온갖 짓을 대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치과의사역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고, 진통제 한 알도 없었다.
그래서 심한 충치로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심리적 마취를 십분 활용했다.
즉 고통스런 치료가 성공하도록 주문을 외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게바라는 의사로서 활동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산속에서의 전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라 플라타병영 습격에서부터 엘 우 베로 전투, 엘 옴 브리트 전투,
그리고 알토스 데 콘라도, 브웨이시토, 피노 델 아구아, 마르 베르데 등의 전투에까지....
이 공적이 인정되어 7월에는 소령으로 진급되었다.
게바라는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고, 조직가로서의 능력도 탁월하였다.
그의 생애중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25개월간은 그를 조직이론가, 사상가, 전략전문가
그리고 영웅으로 만들었다.
게릴라군은 산속의 근거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게바라는 병영본부를 건설하고 야채밭, 목장, 진료소, 빵 공장, 간이 방송국, 담배와 신발,
무기제작창 등을 세웠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도 신중하게 추진했다.
이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게바라는 등사판 신문 [자유 쿠바인]을 발간하여 병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58년, 게릴라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역량을 강화해 갔다.
이해 2월, 게릴라군은 드디어 산을 내려가 혁명전쟁을 개시할 것을 결의했다.
시가전이 조직되었고, 독재자에 대항하는 투쟁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개되었다.
날이 갈수록 전선은 확대되었다.

1. 피델 카스트로,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속에 남아 전부대 지휘.
2. 3월 라울 카스트로, 시에라 크리스탈 지역에 동부의 제2전선을 구축.
3. 후안 알메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를 포위하기 위해 하산.
4. 카밀로 시엔후에고스 별도의 공격부대 지휘를 맡기 위해 섬의 서쪽으로 출발.
5. 8월 31일,
체 게바라, 제 8공격부대와 함께 출발.
6. 에스캄브레이 산속에서는 또 다른 저항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핵심적인 그룹은 '대학생동맹'과 '인민사회당(공산당)'이었다.


게바라가 이끄는 부대는 농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옷은 너덜너덜하게 헤어지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배를 채웠지만,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들판에서는 하늘에 노출되어있어 자주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혁명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참가했던
병사들은 자주 도망을 쳐서 밀고해버
리곤 했다.
이런 와중에도 게바라 부대는 20개 이상의 강을 건너며 섬 중앙부를 횡단하여 마침내, 에스캄브레이 산속의 게릴라들과 합류했다.
게바라는 그곳에서 가축을 훔치는 등,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던 산적과 다름없는
"자칭 혁명가"들의 규율을 바로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도적떼 같은 가짜 혁명가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독재의 날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게바라 부대의 산타클라라 공격은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 되었다.
산타 클라라 전투의 상황을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산타 클라라는 쿠바섬의 중앙평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15만의 이 지역 중심
도시였다.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온갖 소문이나 정보가 가장 빠른 시간에 모여들고 퍼져나갔다.
우리는 공격 당시 소총부대를 상당히 증강시겼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역량도 갖추었다.
비록 폭탄은 부족했지만 중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바티스타군의 전차대를 공격할 바츄카포도 입수했다.
우리들은 까마후아니가의 도로 입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경비에 임하고 있는 바티스타군
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12월 29일, 해방조국을 향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까피로 언덕의 수비는 상당히 완강했다.
30일, 이곳에서 하룻동안 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시의 다른 지역을 점차 장악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본부와 장갑부대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자 까피로 언덕이 포위되어버린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당황하여 철도를 이용해 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철로를 파괴해 퇴로를 끊어 놓았기 때문에 기관차와 객차 여러대가
탈선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집중 폭격을 퍼부어 대자 장갑열차는 성냥곽처럼 부숴졌다.
고사포와 기관총, 그리고 엄청난 양의 총탄을 고스란히 내놓고, 적들은 22대의 차량과 함께
항복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바라 부대는 12월 31일 경에 산타 클라라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날 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바티스타의 탈출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현금과 보석자루가 비행기에 실리고, 공포에 질린 바티스타
부부와 그들의 절친한 몇몇 외국인 친구들이 함께 탑승했다.
(※ 영화 "대부"에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비행기는 산토 도밍고를 향해 소리없이 이륙했다.
새벽 2시 10분에 너무나도 황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경호원
이나 수행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했고, 측근들은 작별인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바티스타의 부인 루시아는 귀금속이 달린 블라우스
와 현란한 장미빛 판타롱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렸지만 불안
해하고 초초해하는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출발한 직후 일어나는 일들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두 명의 장군에게 집무를 대행하도록 명령하고, "
체 게바라"라고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 따위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는 정권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5. 쿠바해방! 또다른 시작

The people liberate themselves - Che Guevara

1959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드디어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 피델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군 쿠바 수도 아바나 입성 장면 동영상
보기)
게릴라군의 아바나 입성장면, 가운데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가 보인다. 쿠바는 해방된 것이다.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
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차라리 양키의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 민중을 학살했다.
살인, 강간,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
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모함을 당한 것으로 밝혀진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깍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
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
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이 생긴 후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또, 어떻게 해줘야 그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내야 할 진정한 혁명이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 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
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한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이론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은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
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조아들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까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
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법률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
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
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데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
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1959년 2월 9일에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
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착실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익보다 민중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 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6. 제 3의 길을 향하여...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필요없다! - Che Guevara

피델 카스트로의 추천과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게바라는 국립농업개혁국의 공업부장
이라는 경제 부문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을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나라들의 경제부문에 대한 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게바라 개인으로는
일찍부터 자신이 꿈꾸어 왔던,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셔츠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낡아빠진 군복풍의 셔츠를 걸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머리로 총재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급료를
5천페소에서 1천2백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에 놀란 쿠바의 부르조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모두 마이애미로 줄행랑 쳤다.
이즈음,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폐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남발
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쿠바 경제가 붕괴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쿠바의 경제공황을 노렸다.
이를 간파한 체 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쿠바의 인쇄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게바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체 게바라의 싸인 미국에서 쿠바의 지폐를 마음대로 찍을 수 없도록 지폐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인쇄하도록 하고, 위조할 수 없도록 자신의
싸인을 새겨 넣었다.
지폐 난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쿠바 혁명정부의 전복을 노리던, 미국의 계략은 게바라로 인해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게바라가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중앙은행의 임원이었던 호세 산티에스테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행업무 중에서 그가 가장 고심한 것은 외화의 축적이
었습니다.
그는 매일 외환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보면서 모든 문제를 분석하곤 했습니다.
그는 새벽 서너시까지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하고 늘 재정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상의했었지요.
간부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을했습니다.
부하들이 과실을 범할 때는 엄격하게 질책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인간적이었어요.
심약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죠.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혁명적인가 어떤가 살펴보고, 일단 눈에 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금융정책을 오로지 혁명사상을 현실화시키는 무기로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게바라는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경우, 그 채택의 근거를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
적인 측면에서 찾았지요.
중앙은행은 단 하나의 참된 가치 즉 "혁명수행에 있어서의 동지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원칙과 일상적인 삶 그 모두에 있어서 가장 인간적이며 혁명
적인 사람이었지요."
1960년에 게바라는 자신의 발로 사회주의 국가의 땅을 밟아보는 꿈을 실현했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등을 방문하고 RDA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강경하고 빈틈없는 체 게바라의 쿠바내 미국재산의 국유화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확대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국유화한 토지, 은행, 제당공장, 상사 등은 대부분 양키 자본가들의 소유였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미국은 마침내, 쿠바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다.
1961년 1월 8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에 걸쳐 미국은
피그만해안을 침공했다.
게바라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그의 게릴라 전술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쿠바의 육, 해, 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혁명군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물리쳐내었다.
체 게바라가 버티고 있는, 쿠바군은 이제 더이상 미국
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들고 세계를 향해 공언했다.
쿠바는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 재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바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게바라는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갖가지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다.
그의 경제 정책의 골격은 아래와 같았다.
급진적 농지개혁, 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 급속한 산업화, 1차 상품의 수입제한,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외화축척, 임금제도의 개선...
그러나,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즉, 노동자의 투쟁이 한결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경제투쟁으로 나아간다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체 게바라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이제야 게릴라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지나친 임금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을 하지않는 매우 고급스런 직업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게바라가 생각하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
이었다.
노동의 본을 보이는 체 게바라"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자국보다는 '의식의 개혁' 이 훨씬 더 효과적
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금전욕이나 명예욕 혹은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상태에 이를 때, 더
이상 노동이 괴로울 필요가 없어지고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유혹이란 새로운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척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그런 부조리한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쿠바 사람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소란스러우며, 행실이 분방한 국민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쿠바에는 기술자도 전문직 노동자도 없었고,
경제 계획도, 예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태만함, 결근, 여럿이
모여서 복잡거림 등의 생산성 하락요인을 없애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습득, 유능한 관리자의
육성, 양키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공장운영...
이런 사항이 게바라에게 부과된 중대한 과제였다.
게바라는 노동 그 자체보다는 자유의지로 하는 잉영노동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하나의 요인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대중교육의 원천이다.
모든 사회적 과제 배후에 있는 목적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게바라는 붉은 자발노동대를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돌아가 사탕수수를 거두고 노동자 주택의
건설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물론 게바라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었다. 이순간 그는 중앙은행 총재도, 쿠바의 2인자도
아닌, 한사람의 노동자였다.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사람
답게 사는 것을 보고자 했다.
아래는 그 당시 체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한 노인의 증언이다.
"체 게바라는 좋은 옷이라든가 새구두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한번도 우리 노동자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도 없었구요.
우리와 같은 노동자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지급받은 것을 먹고 입었어요.
그는 특권을 갖는 것도 매우 싫어했지요.
자신의 부하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항상 자신을 경계했어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이 게릴라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요.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아닙니까?"
증언을 마친 노인의 눈에선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였고 퇴근할 때는 맨 마지막이
었거든요.
게다가 대개의 경우 가능한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너무
늦어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작업장에서 그냥 노숙했지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어요.
침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요."
"그는 노동자에게 공손하고 싹싹했지요.
함께 자발적 잉여노동을 할 때나 공장으로 갈 때,
처음에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도 게바라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유
롭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
리면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그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 아니었어요.
그저 한사람의 노동자 친구였어요."

"산타 코로마 농장에 있었을 때, 새벽녘 무렵이었는데,
게바라가 갑작스런 천식 발작으로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가 '왜 잠시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약을 꺼내오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렇게 닥달하지 말아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요.'"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였고,
그가 세운 계획들도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습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는 OEA(미주기구=미국의 지배기구의 하나)의 '경제사회심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라이프지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어떤 때는 화려하고 잘난 척하는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호감을
주는, 구렛나루를 기른 이 쿠바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참석자는 게바라가 능숙하게 외교적인 제스쳐를 쓴다고
하여 <체체>라고 이름 붙였다.
게바라의 이상한 언동은 그를 적대시하는 그룹에게 있어서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들
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익의 보호를 받지도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진보를 위한 동맹"의 스폰서인 미국을 공격하면서, 쿠바가
동맹의 자금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
을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게바라야말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소련의 침입과 지배를 불러들일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NO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푼타 델 에스테 헌장에 서명한 각국 대표들은 만족해 하며 해산했다.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게바라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권으로부터의 원조는 만족할 만큼의 효과가 없고

2004-09-09 20: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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