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숨은 꽃 악양 형제봉
<형제봉 가는 길 어디 쯤에서 찍은 사진 >
세상 일이라는 것이 꼭 내 심사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서 아마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진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산을 좋아한 것은 꽤 이력이 된 과거다.
내 고향 김제는 평야다.
말 그대로 평야… 산이 없다.
그저 어슴 결 아침에 해가 뜨는 곳에서 모악산이 보일 뿐 내 사는 근처에 산이라고는 구릉에 소나무 밭이 전부였다.
이런 내가 지리산에 처음 온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였다.
누나의 남자친구 그러니까 지금 매형이 누나와 산행을 하기 위해서 나와 동행을 청했다.
그저 놀러 가는 것이 좋아서 나는 선뜻 응했고 지리산과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로 거의 매년 그 산을 올랐다.
종주도 여러 번 천왕봉 일출도 여러 번.. 그렇게 그 산을 찾았다.
영하 30도의 혹한의 겨울 산을 미치듯이 걷기도 했고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하루에 달려 가기도 했었다.
억누르지 못했던 가슴을 식히기 위해서 찾았고 친구들과 우정을 위해 찾았다.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면서 마지막 찾은 곳도 이곳이었고 새 천년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그 해 첫 날 일출을 보기 위해 찾은 곳도 지리산이었다.
그렇게 지리산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악양의 들판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고소성 가는 길에서 본 악양들>
유난히 오늘 날이 좋다.
순풍에 떠나는 어선처럼 출발이 좋다.
만선에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휴우….
그런데 왜 나 가슴이 이리 불안 할 까.
콩당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참판댁 가는 길을 벗어나 고소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토지에서 별당 아씨와 야반도주를 한 구천이의 가슴이 아마도 지금 내 맘이었을까..
밤마다 그가 헤매고 다녔다던 고소성에 지금 오르고 있어서 일까..
그처럼 떠나고 싶어서 일까…
길가에 코스모스는 바람에 멋대로 꺾인다.
등산 안내판이 보이고 이윽고 산길로 접어든다.
고소산성에 오른다.
섬진을 바라본다.
세석에서 이어진 지리산 줄기는 시루봉을 지나 제석봉 너머 신선대를 지나면서 낮아지기 시작하더니 산은 투신 자살이라도 하듯 섬진의 물결로 자맥질 했다가 다시 백운산으로 튕겨 오른다.
푸른 바다를 노니는 돌고래처럼 물 속으로 사라졌다가 뛰어 올라 백운산 자락을 만들고 다시 남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형제봉 가는 길 어디 쯤 내려본 섬진강>
동편은 악양이다.
중국의 악양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 악양..
이백이 달빛을 잡으려 죽었다던 동정호라는 이름의 호수도 악양에 있다.
<악약의 들판.. 저 들판 너머 어딘가에 지금 내가 살고 있다>
악양의 들판이 황금 빛으로 반짝인다.
악양의 다랭이 논들은 산을 내려오면서 시작했다.
그렇게 내려와 넓은 들판에 평야를 만들고 다시 산으로 기어 오르다 힘에 부치는 그 어느 선쯤 멈춘다.
땅 붙치면 살던 사람들의 노동이 만든 작은 논들...
저 다랭이 논들이 언제까지 생산의 힘이 작용하는 경작지로 남아 있을지..
저 작은 산비탈 계단 논에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욕심이 작은 사람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나면 저 논 들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그저 저 땅에 아직도 생명을 키워내는 사람이 있음이 감사 할 따름이다.
<갈대들>
걸음을 재촉해서 신선대로 오른다.
가는 길마다 튀어 나오는 절경에 넋이 빠져 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이제 그만 사진을 찍자..
이제 그만 경치를 보자..
아무리 다짐해도 형제봉 가는 길에서 그 말은 금새 거짓이 되고 만다.
고개를 돌리면 섬진강이,
고개를 돌리면 안약의 들판이..
앞을 보면 형제봉 단풍이 유혹한다.
아마 이 길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구름 다리>
어느새 구름 다리를 지난다.
갈대 밭이 보인다.
내 년을 준비하는 숨 죽인 철쭉들이 보인다.
따뜻한 시월의 햇살이 갈대들을 간지르며 빛났다.
조용히 갈대처럼 흔들 흔들 걸어본다.
<갈대도 지금 지리산을 보고 있을까>
백두 대간의 마루금이 떠올랐다.
지난 여름 올랐던 향로봉의 꽃들도 생각난다.
모두 이제 추억인가…
하나하나 올해의 기억들이 추억으로 사라지는가..
단풍이 곱게 든 지리산의 가을에서 서럽게 시린 하늘을 보면서 한 해를 벌써 보내버린 듯 착각에 빠진다.
오늘
지리산의 가을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일까..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모든 것들이 추억처럼 보인다.
<세월이 물들고있다>
봄이 오는 속도는 개나리가 피는 속도이고, 가을이 오는 속도는 단풍이 물드는 속도라고 하더니 지금 지리산 위에서 가을이 내려오고 있다.
아니 세월이 내려오고 있다.
무심하게 세월이 물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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