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해 아침이 밝았다. 날마다 태양은 떠오르지만 하루의 소망이 한 해의 소망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즈음이기에 누구나 들뜨게 된다. 들뜬다는 것은 뭔가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것을 뜻하지만 되짚어보면 에너지 분출의 방향이 혼돈에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새해 소망이라는 지나친 기대와 두려움이 암수한몸처럼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호크 족의 추장인 제이크 습지는 ‘해맞이 감사의 인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우리를 이처럼 인간으로 살게 해주신 위대한 신령의 산물에 감사드립니다.” 이는 들뜬 마을을 가라앉히는, 보다 근원적으로 돌아가서 에너지의 분출이 아니라 속으로 에너지를 더 다지는, 말하자면 내공을 키우는 맹세인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어떤 이들은 산으로 바다로 일출을 보러 가고, 어떤 이들은 지인들과 만나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고, 또 어떤 이들은 두문불출하며 외로움을 즐기기도 한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모두들 한 해를 마감하고 속으로 또 한 해 살림살이의 조감도를 그리고 또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모두들 새해 소망이라는 보따리에 뭔가 자꾸 채우려고만 했지 비우려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모든 소망과 맹세가 해마다 반복되는 용두사미 아닌가.
새해 첫날 다행히도 나는 비우는 일로 충만할 이들을 만났다. 지리산 실상사의 귀농전문학교에 모인 일단의 무리들과 저녁시간을 함께 했다. 이름하여 ‘비움의 잔치’에 초대된 것이다. 전국에서 몰려온 50여명의 사람들이 4박5일간의 단식을 하고 있었다. ‘먼저 창자를 비우지 않고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겠는가. 욕망, 그 모든 욕구는 이 몸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메스를 사용하지 않는 내장수술, 가장 완벽하고 섬세한 만병통치 요법’이라는 단식을 새해의 화두로 삼은 이들이었다.
녹색연합과 지리산생명평화결사가 공동주최한 ‘비움의 잔치’는 해발 7백 고지의 귀농전문학교에서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등 낯익은 얼굴들이 꽤 많이 모인 이 자리에서 나는 명색이 시인이다 보니 시를 낭송해야 했다. 무얼 읽을까 궁리하던 끝에 나는 나의 졸시를 ‘비우고’ 신경림 선생의 시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를 낭송했다.
‘이쯤해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 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신경림 선생의 일갈 ‘이쯤해서 길을 잃어야겠다’는 선언은 그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모두들 길 위에서 잃은 길을 찾느라고 몸부림을 치고, 뭔가 더 채우려고만 발버둥을 치는 가운데 새해 소망을 ‘이쯤해서 길을 잃어야겠다’로 정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실 우리는 날마다 길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참 많이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바로 이러할 때 '우리는 길을 잃었다‘는 선언을 끝내 유보하는 것보다는 ‘이쯤해서 길을 잃어야겠다’는 다짐이 훨씬 더 멋지지 않은가.
새해 아침부터 굶는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금단현상과 관장 등으로 육신은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한결같이 환한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단식 중에 ‘자비심 연습’이라는 독특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소개를 하면 이렇다. 가까운 누군가에게 주의를 쏟으면서 혼잣말을 한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자기 삶에서 고난을 피해보려 하고 있다. 나와 똑 같이 이 사람도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겪어 알고 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고 있다. 나와 똑같이 이 사람도 삶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게 뭔가 길을 잃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에게 마침내 환한 길이 열리고, 비우고 또 비움으로써 마침내 더불어 채워지는 이 행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4박5일간의 단식, 그 아찔한 충만이 또 한 해를 살아가는 지극한 양식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