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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마을> 일백육십팔호 : 아무 짓도 하지 않는 하루를 위하여
정풀 2005-06-15 10:29:19 | 조회: 5117
<청산이의 표정은 단 두가지다. 겁 먹거나 배 고프거나. 진도개와 풍산개가 반반 섞였다는데, 좀 이상하다.>


잡지<마을> 일백육십팔호 : 아무 짓도 하지 않는 하루를 위하여
이천오년유월십일쇠날, 오래된미래마을, 정풀홀氏



여섯시에 일어납니다. 더러 일곱시에 일어나지기도 합니다. 거의 외출하지 않으니 세수는 늘 짧고 간결합니다. 다만 씻을 곳은 잊지 않습니다.

어리고 작아 밤엔 집안으로 들여 재우는 구름이를 마당으로 배변토록 내모는 게 하루의 첫 일과입니다. 동시에 겁이 워낙 많아 바람소리에도 기겁을 하는, 밤새 홀로 마당을 지키는 일이 고역일 청산이를 위로하는 척 하느라 밥통과 물통을 가득 채워줍니다. 청산이의 삶은 지난시간 어떠한 불행에 처했더라도 넉넉한 배식량을 확인하는 순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경지로 귀의하고 맙니다. 청산이을 명백히 청산이게 하는 정체성입니다.

그래도 밤새 주인을 대하는 눈빛이 다소 야속해지고 불만스러워진 청산이는 ‘(나만 홀로 야생의 마당에 방치한 어젯밤에는 못내 서운했으나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이제 새아침이 왔으니 평소에 관리하는 내 구역에 참았던 똥도 싸고 오줌도 누워야 하니) 어서 동네부터 한바퀴 산책시켜달라‘며 불평과 애걸을 섞어 끙끙댑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합니다. 자칫 해달라는 대로 순순히 다 해주었다가는 언젠가 ’무섭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나도 같이 자게 해달라‘고까지 생떼를 쓸지도 모를 공멸의 위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으로서 주인 구실은 할테니 너는 야생에서 집 지키는 개의 본분을 잊지말고 개처럼 잘 지내라‘고 버릇을 들이는 중입니다. 그런 뜻을 헤아릴까 모르겠습니다.

이어 방치된 빈 컨테이너 박스에서 동거하는 오리 1,2, 거위 1,2, 닭 1,2를 견인해내 방치된 집터의 사파리로 방사합니다. 여섯 마리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밥통과 물통을 새로 채워줍니다. 밥통은 주로 닭이, 물통은 주로 오리가 과점합니다. 주식 외에, 민들레잎같기도 하고 고들빼기 잎같기도 한, 큰 것은 뿌리가 마치 인삼의 모양과도 같은 야생초와 돗나물을 부식으로 뜯어 흩뿌려주면 게눈 감춥니다. 부식은 주로 거위 차지입니다.
사파리안의 야생초는 죄다 뜯기도 짓밟혀 초토화된지 오래입니다. 주로 온종일 먹을 것을 탐하며 싸돌아다니는 거위의 소행입니다. 먹는 중에도 풀똥을 싸고 뒤뚱거리며 도주하는 중에도 풀똥을 싸대는 꼴은 그야말로 짐승같습니다. 내 인기척이 나면 먼저 쫓아다가오고, 행여 빈손이면 야멸차게 돌아서는 약삭빠름은 사람같습니다.
배식이 끝나면 동네 어귀까지 청산이, 구름이와 돌거나, 뜁니다. 귀찮으면 거릅니다. 행여 산책을 거르면 청산이는 짜증내고 투덜거립니다. 주의가 산만하고 행동이 거칠어 하루종일 묶여있는 팔자라 그러는 걸 아는지라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텃밭에 심어놓은 옥수수, 상추, 감자, 호박, 당근, 아욱, 치커리, 당귀, 콩, 들깨 등의 안부를 살피는 게 다음 일입니다.
그러니까 끙끙거리거나 꽥꽥거려 사람을 자극하는 동물류의 안부가 먼저, 아무 소리 하지 않아 덜 신경쓰이는 식물류의 안부가 나중인 셈입니다.
뽑아내면 다시 그 이상 텃밭을 뒤덮고 있는 야생초들을 뽑아내는 게 주된 일입니다. 일이라기 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맨땅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보고 만지고 느끼는 신비로운 유희에 가깝습니다. 물론 생업이 달린 농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사치스럽고 방만한 감정입니다. 농사가 생업이었다면 천방지축 야생초의 무성한 생명력에 느껴지는 적개심은 감당키 어려울게 뻔합니다.

동거하거나 수용된 동물과 식물을 다 회진하고 돌아오면 아홉시쯤 됩니다. 인터넷을 열어 그새 도착한 새편지를 확인하고, 어제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들여다봅니다. 기다리지 않은 편지, 사람사는 세상과는 무관한 뉴스, 무용무해한 정보가 세상의 대종을 이룹니다. 밝은 아침햇살에 맞추어 게중 맑은 상태의 눈으로 책도 몇쪽 읽습니다.

11시쯤 상추, 치커리, 당귀, 깻잎 등속의 쌈채정식이 주메뉴인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친구는 차로 30여분거리의 진주에 돈 벌러 나갑니다.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가서 밤 열시 넘어 돌아오는 격무입니다. 주말은 쉬지만 쳐다보느니 안타깝습니다. 돈의 부재로 인한 불편함과, 돈의 존재 이유에 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매순간입니다.

이후 사람이라고는 온전히 혼자만인 집이 됩니다. 옆집 아주머니 마실 나가는 소리, 전원주택 짓는다고 트럭 왔다갔다하는 소리,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 말고 원하지 않는 소음은 없습니다. 온갖 새 소리, 지리산에서 쏟아져내리는 묵직한 바람 소리 뿐입니다.
내내 책 읽고, 책 생각하고, 책 쓰고, 담배 핍니다. 점심 겸 저녁은 배고플 때 먹습니다. 구름이와 청산이, 그리고 거위 1,2, 오리 1,2, 닭 1,2, 그리고 최근 생포한 사슴벌레, 두꺼비, 청개구리 1,2,3 등 동물류의 2차 안부를 살피고, 텃밭에 나가 식물류의 안색까지 살피고 나면 금세 초저녁이 됩니다. 시간은 쏜살같습니다. 벌써 이천오년이고, 벌써 유월입니다.

밤에는 마루에 앉거나 누워 친구가 힘들지않게, 무사하게 귀가하기를 기다리며, 주로 ‘사람 잘 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찍은 다큐멘터리나 박주영과 박지성의 ‘진정한 축구’나 웃으면복이와요의 ‘겁먹었을거야’ 따위를 TV로 보거나, 한나절 늦게 배달되는 한겨레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을 끄집어내 뒤적거리거나, 여러 장르의 책을 남독하거나,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 겸 양서를 궁리하고 획책하거나, 멀리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근황을 궁금해하거나, 소망하는 마을과 집을 찾아내고야말 계획을 세우거나, 결국 앞으로 어찌 밥벌이하고, 어찌 잘 살아갈지 걱정합니다. 그리고 자정이 넘지 않게 잡니다. 하루종일 나는 아무 짓도 하고싶지 않습니다만.
http://cafe.daum.net/Econet
2005-06-15 10: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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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댓글과 답글 1
  • 하리 2005-06-15 11:19:31

    동물들 이야기 참 좋네요. ^^ 저도 문화센타에 동물들이 많아
    좋을때가 많아요.
    거위랑 오리 이야기 들으니 그런 얘들도 있으면 키워보고 싶네요.

    TV와 신문과 밥벌이에 대한 걱정과 주변에서 나는 몇가지의
    소음을 제외하면 딱 제가 살고픈 모습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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