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었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이나 같이 하잔다. 모처럼의 전화가 미심적기도 하려니와,썩 끌리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갔었다.
젊어 한때는 가까이 어울린 친구였으나, 차차 철이 들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점점 사이가 멀어져, 끝내는 서로 소식이 끊긴지도 벌써 십 여년이 넘는 것 같다.
자영업을 했던 그는 뚜렷한 어떤 결점은 없었으나, 잘 풀릴 때는 만나면 지나친 거드름이요,사업 부진으로 어려울 때엔 은근히 심적 부담을 주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조금은 허풍이요, 몰염치로 가끔 비위를 거슬리게 했던 친구였었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사람이 되었다. 얼굴부터 환해 보이며, 말투도 아주 순화되어 있어서 그의 외모부터가 한결 의젖해 보였다. 그의 기품에 나의 초라함마저 느껴졌으며, 오히려 좋지 않는 선입견으로 마지 못해 만난 내가 황당스런 자만이라는 생각에 새삼 미안한 마음이다.
점심을 들면서 듣는, 그가 그동안 지냈던 이예기는 대강 이러했다. 사업은 빚더민 채 가족의 생계마져도 어려운 처지에, 건강마저 좋지 않아 정말 참담했단다.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도 허무하고 비참한 생각으로, 결국 새출발을 결심하고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려니 모두가 결사 반대였다.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어 결국 방방 뛰는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오지를 찿아 들었다.
처음엔 정말 못참겠더란다. 그러나 가족들에겐 가장의 책임때문에 기필코 오기로 지탱하며 참아야 했고,채면으로라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일이년을 버티다보니 점점 견딜만 해지면서 살길도 차츰 풀리었다. 이런 생활이 벌써 일곱 해나 됐다며, 지금은 가족들이 더 행복해 하며, 오직 감사의 마음뿐이라는 그의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가 차라리 성스럽게 까지 느껴졌었다.
잔을 나누며 나는 분위기를 바꿔 슬적 작난스레 말을 걸었다.
“그래 그 일확천금의 꿈은 이제 끝났는가 그 준재벌의 꿈 말이야! 한 두 배도 아닌 수십, 수천배의 계산법을 지금은 버렸겠지”
너털웃음을 하며 그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지금도 나의 계산법은 바뀌지 않았으나 욕심이 달라진 것 같아” “이제는 길을 제대로 찿았다네, 작은 씨앗 한줌이면 그 몇십, 몇천배를 걷우는 작물을 수확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길, 절대로 거짖을 모르는 자연앞에서 말일세”
“나는 지금 자연을 보증으로 땅과 동업을 하고 있네. 그 보증을 서준 자연이 나에게 약속을 했다네. 앞으론 나에겐 절대로 실패란 없네.“ “내가 계산이야 제대로 잘 하지, 다만 좀 욕심이 지나쳐서 문제지만.”
그러면서 그는 말을 계속한다.
“지금의 나의 삶이 왜 이리도 신나고 행복한지!” 너스레를 떨던 그의 풍은 여전했다. 그러나 옛날의 허풍은 분명 아니다. 이는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일 것이다.
“잘 있게나, 나는 바빠서 지금 가야하네.” “여기 약도와 전화번호가 있네, 시간이 되면 가족과 함께 한번 다녀가게.” 쪽지를 건네며 거침없이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힘차게 손을 져었다. 진실로 그의 행복을 빌면서. (05 8. 여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