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폭설.
세상 모든 것엔 갑작스럽단 말은 없습니다.
다만 닥쳐올 뿐임을 이번 폭설로 알았습니다.
11월 기온이 25~6도를 넘나들 때, 티비에선 바다에서 스중기가 올라가는 장면을 내보내며
서해안의 폭설을 예고했지만 그러나 그건 그냥 예고일 뿐, 닥쳐온 무슨 습격같은 겁니다.
난 무너져 내린 저온저장고와 선별장을 멀찌감치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지요.
'누이여
벌판에서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머리엔 아직 바람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고 말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가고 가는 우리들 삶의 뒤안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누이여
이제 나는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너의 뒷모습을 비추이는
작은 촛불이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밖의 누이여.
-故 박 정만님의 詩 "누이여 12월이 저문다" 全在
농부는 이제 한숨 돌릴만큼은 되었습니다.
격한 노동은 이제 거의 끝났고
따뜻한 아랫목, 긴 겨울을 아이들과 여행도 하고 밀린 책도 읽으며 시름도 없이
호젓하게 지내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삶이 혹은 세상 드난살이가 그럴리 있을까요?
자유무역이란 공룡은 우선 가장 사회적 약자의 희생과 고통을 요구합니다.
저 역시 가을걷이가 끝났음에도 다시 바빠졌습니다.
농민단체의 막내이면서 지도부의 한귀퉁이를 차지한 적이 있기에
이틀 간격으로 벌어지는 상경투쟁에 파김치가 되어갑니다.
여의도에서 과천으로, 국회로 저수부지로 정읍에서만 평균 천여명의
나이 드신 어른들을 이끌고 오르락 내리락....
그러나,
코피가 쏟아지고 멀미 탓으로 하루에 몇번씩 구토를 해대어도
갈라진 손등, 주름진 이마, 어수룩한 낡은 양복과 잠바를 보면
아직은 젊기에 다시 힘이 솟곤합니다.
우리나라의 농민은 전체 인구의 약 8% 정도입니다.
생산성은 전GDP의 2.5%정도입니다.
분명 시장 논리로는 퇴출 대상이겠지요.
전 이 글로 왜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우리나라 땅값은 중국의 그것에 비해 약 12배정도 비쌉니다.
노동력의 생산성은 더구나 수십배에 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민 대비 평균 수익률은
이미 75%미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정은 이러함에도 오로지 농업에게 시장적인 경제 가치만을 들먹이는 천박한 자본주의 땅
에서 우린 농업을 합니다.
농업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공익적 시스템을 철저히 깔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국회 앞에서 허수아비를 세우고 화형식을 가졌습니다.
전국에서 3만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였지요.
그때 불태운 허수아비는 미제 메이저 곡물회사를 상징했습니다.
헌데,
일부 보수 신문에 게재된 한컷의 그림은
전경이 각목 든 농민에게 맞는 모습뒤로 불타는 사람(허수아비)입니다.
실로 끔찍한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시위를 주도 했던 지도부의 한사람으로 터지는 분통을 애써 누르려
술깨나 마셔댔습니다.
저도 메이저 언론사에 근무한 경험이 있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교묘하게 그들은 대중의 눈을 가리는데 정말 미칠 일인 건,
바로 그 옆에 제 옆 동네에 사는 김 용택 시인이 생뚱맞게 1인 피켓시위를 하는 모습을 걸었습니다.
섬진강 상류를 막아 적성댐을 만드는데 외로이 피켓 한장 목에 걸고
허름한 잠바에 흰 운동화를 신고서 댐 건설 반대 시위를 하는 사진에 제목은 "시위도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야...".
전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두개의 사진을 동시에 그려봤습니다.
수만명이 교통을 마비시키고 가로수를 뽑아내고 막걸리와 욕설과
각목이 난무하는 시위대의 모습 하나....
단 한명이 이는 바람속에 꼿꼿이 피켓 한장들고 서있는 침묵의 시위 하나...
두 사진이 함께 걸려 있다면 어느쪽이 더 설득력이 있겠는가!!
과연 대다수의 대중은 어느쪽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고 이건 언론이 저지르는 추악한 기만입니다.
꼭 군홧발과 곤봉, 물대포와 방패만이 폭력이 아니고 이게 바로 폭력이고 대중의 눈을 가리는 사기입니다.
전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자
다시 좌절하고 저무는 12월에 쓸쓸해졌습니다.
정읍 농부 미루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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