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나눈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나눈다면 아마 나이 사십 정도가 후반부 아닐까 합니다.
오늘 하루 왼종일 과수원에서 일을 하며 내 나이 마흔 넷을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후회되는 부분이 아주 없진 않지만
나름대로는 꽤 괜찮은 삶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 있죠.
혹시 중국의 '여불위'라는 사람 아세요?
쓰마첸(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그 유명한 진시황의 친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원래 여불위는 양책이라는 도시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거상이었습니다.
그가 마흔넷이 되었을 때 조나라로 장사를 갔다가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를 만나고
여불위는 자초에게 시쳇말로 올인을 합니다.
후에 자초는 진나라의 장양왕이 되고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불위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첩에게 임신을 시킨 후 장양왕의 후실로 보냅니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태자 정(政)인데 그가 바로 시황제인거지요.
물론 훗날 여불위는 진시황의 어머니와 밀통한 혐의로 압박을 받자 자살하고야 마는데요,
그러나 그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에도 남자의 후반부인 마흔을 넘겨 또다른 야망을 불사르는 그 열정을 난 감탄합니다.
한사람 더 얘길하자면,
춘추시대 한나라 무제 시절에 '공손홍'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그가 하는 벼슬이 고작 옥리(獄吏) 즉 옥사장이라는거죠.
그가 이일에 지쳤는지 옥사장을 치우고 돼지를 키웁니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는 얘긴데,
어느날부턴가 그는 맹자와 주자,예기와 중용, 이른바 춘추의 설(說)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이십여년이 지난 후 마침 한무제는 숨은 인재를 찾던 중
지방 관리의 천거로 공손홍을 발탁하여 그를 일약 박사(博士)에 봉합니다.
그가 지금까지도 유명한 건 곡학아세(曲學阿世-정도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속에 아첨한다)란 말을 남겼기 때문인데요,
공손홍 나이 67세에 결국 문관 최고의 자리인 승상에 오르게 됩니다.
꼭 높은 벼슬이나 명예나 큰 부를 쌓은 것만이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세상의 한가지 척도이긴 하지요.(특히 우선하는..)
난 마흔살에 농업을 시작하였기에 나의 마흔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복해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나를 동지라 서슴없이 불러주는 숨결님처럼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가진 생각만으로 농업을 변화시키고 농업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지금은 사과 한박스의 가격이 5만원이 넘으므로 서민이 가볍게 사먹기 좀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과 농민마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지금보다 두배로 늘어난다면
사과 가격은 당연히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고 서민들도 정말 부담없이 사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자들에게야 사과 값이 5만원이든 3만원이든 상관없지만,
우리네 빠듯한 살림살이로는 주머니 부담없이 맛있고 안전한 사과를 먹기엔 아무래도 지금은 조금 비싼 가격입니다.
그렇다고 농부가 떼돈을 버는 건 더욱 아닌 오히려 그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지는 현실이니
난 소비자와 생산자가 더불어 함께 행복한 농업을 꿈꿉니다.
나의 마흔을 요리조리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 날,
난 오늘 농사일지에 이 생각을 정리하며 나의 후반부가 헛되지 않기를 소망해 봅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기여하는 나의 후반부를 기대합니다.
정읍 농부 미루사과
()>dust in the wind-캔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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