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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동에서 (Luna Llena-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미루사과 2007-01-23 20:08:45 | 조회: 6905














대전 오정동 청과시장에서 그대를 만났을 때

난 이십이년 세월을 건너온

미흔 넷의 지난 세월 거울속을 바라봅니다.



붉은 흙이 묻은 운동화를 신고

때에 절은 실장갑을 끼고 힘겹게 사과박스를 내리다가

문득 뒤꼭지가 간지러워 돌아본 그 자리에



아직도 그때처럼 생머리, 흰 얼굴의 그대가 서 있음을 알고

어색하게 웃은 내 입가에는

아니, 내 눈가에는 주름살이 서너개쯤 있었겠지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줄 과일을 사러 왔다가

이십년전 내 목소리, 내 웃음소리를 용케도 기억해 냈다던

그대는

여전히 목이 길었으나 역시

턱밑의 주름살을 감추지는 못했더이다.



그대와 함께 살았으면 했던 지난 시절 거울속에는

화염병을 던지고

노동판에서 등짐을 졌던 내 젊은 시절도 있고,

토슈를 신고 깡총거리며

누레예프라는 무용수를 반짝이는 눈으로 말하던 그대의 젊은 시절도 있습니다.



흐릿해진 눈동자로 만난 마흔네살의 우리는

내 남루한 모습이 순간 부끄러워져 많이도 더듬거렸는데

또 예전처럼 어루만져주는 그대의 한마디,


"기어이 꿈 이루고 사네"


순간 나의 어깨가 절로 넓어졌고 그대의 하얀 얼굴을 다시 쳐다봅니다.



세월의 두께는 그대의 목에 감긴 주름살과 내 이맛살로 켜켜이 앉았고

이제서야 무에 그리 안타까운게 많기도 하여


영문조차 없이 흐지부지 놓아 버린 서로의 끈을

새삼스레 손에 쥐고 만지작거려야 했는지요.




그대가 사는 땅에도 삶에의 투쟁이 있고

나 역시

그대를 잊은만큼의 자리에

그 만큼의 쓸쓸함과 끈적한 삶의 애착이 있습니다.



이젠,

그대와 나

이렇게 늙어갑니다.

편안하시길...

아직도 가냘퍼 애틋한 그대여.




정웁농부 미루사과




파도였나요-한 경애



*누레예프- 루돌프 누레예프, 50~60년대 세계 최고의 남자 무용수,




2007-01-23 20: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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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댓글과 답글 7
  • 불량감자 2007-01-26 07:17:50

    마음에 와 닿는 글이군요.
    마흔이 넘어 오십에 오른 난....
     

    • 숨결 2007-01-24 20:45:19

      가끔 흔들려야
      오래가는 법입니다.

      인간이 인간스러운건 가끔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슬쩍 넘어갔다 와도 괜찮아요.
      그렇게 마흔을 넘겨야

      더욱 든든한 전성시대
      50대가 온다던데..... 미루님!!
       

      • 숨결 2007-01-24 17:54:08

        ㅎㅎㅎ
        지는 이런 글을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데..

        만 마흔넷이 되면 가능하려나...
         

        • 노래하는별 2007-01-24 12:05:39

          미루사과님 시인이시네요...
          사과도 정말 맛있구요
          가끔씩 살아나는 추억도 아름답지요
           

          • 꽃마리 2007-01-24 10:12:30

            미루사과님!!
            안녕 하셨요.~~
            이 글 사모님이 보시면 질투하시것슴다.ㅎㅎㅎ
            과거는과거, 현재는현재 넘 과거는 그리지
            마셨요.^^*
            추억 좋슴다....
            미루사과님 행복하이소..^(^
             

            • 목사골 2007-01-24 02:22:36

              웬지 마음이 짜안하고 가슴에 무엇인가
              남아 있을듯한 생각들이 스쳐 가네요.
              그래도 무쟈게 반가웠을것 같은 상황.
              어쩜 그런 일들이 넘 부럽기도 하고..^^*
               

              • 복돼지 2007-01-23 23:54:11

                몇번을 읽어도 참 감동적이네요...저도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이렇게 글로 표현할수 있으면 좋겠네요...^^ 지나간 애틋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왠지 짠~~한 마음이 일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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