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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닮 게시판  [ 모두 함께 참여하여 만드는 초저비용농업의 해법! ]

밥만 먹곤 못살아!
미루사과 2009-06-07 00:37:54 | 조회: 8682

우리나라 사람들 예로부터 신을 참 많이 모십니다.


4대 종단이야 머 말할것도 없이 어린 시절,


할머님이 매일 새벽이면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두손으로 빌던 천지신명과 우리들보다 먼저 밥을 받아먹던 부뚜막 신,


동네 뒷산 소나무 밑에서 맨날 울기만 하던 처녀귀신,


당산나무 그 많은 가지에 온갖 휘헝한 천자락을 늘어놓던 당산나무 신,


심지어 칫간가면 밤에만 나타나던 빨간종이 노란종이 귀신, 귀신, 귀신, 신신신...



거의 석달넘게 아내와 대화는 커녕 얼굴조차 못마주칩니다.


워낙 과수원의 일이 많으니 집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과원에서 자는가 하면,


새로 대규모 과원을 조성하느라 많은 인부를 고용하다보니 그들과 술자리에 지쳐 곯아 떨어지고,


몇해전부터 작정한 "장자"를 강역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아내의 눈치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요,


아내의 최대 자랑인 음식의 가짓수가 현저히 줄기 시작하더니 지난 일요일 아침, 오랫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신문을 보는데...


설거지소리가 요란하더라구요. (Ah~~see 집안 가득 불안하게 내려앉는 이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깨갱~~!!


난 세수도 못하고 숨죽이며 발뒤꿈치 들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내는 애먼 늦둥이에게 꽥꽥 기차 화통삶아 먹으며 소락배기를 지르는 겁니다.


마흔살넘어 어쩌다 술독에 빠진 날 거시기로 태어난 여섯살짜리 이 이쁜 늦둥이...


먼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 큰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그럼에도 난 아내가 너무 무서워 그냥 도망쳐 나왔답니다.(헐,헐,헐, 이건 뭐야?)



홀로 사과나무를 매만지고,


홀로 라면을 끓여 먹고,


홀로 봉지 커피를 타마시며 이제 막 모심기를 하는 아랫쪽 너른 들녘을 바라보는데,


문득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비리프라카"


제우스의 본처인'헤라'나 그렇게 이쁘다던 '아프로디테'도 아닌 뚱뚱하고 심술맞은, 귀가 아주 큰 여신-비리프라카라니..?


그러고 보니 그 여신은 부부싸움의 신이랍니다.


큭~~(잠시 여신의 맡은 바 임무를 생각하다 다시 큭...큭)


웃음이 비져 나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많은 신들이 있다지만, 이야~~ 아무리 그래도 부부싸움의 신은 좀 너무하지 않나? @.@;;;


로마사람들은요,


본격적인 부부싸움을 하기 전,


언덕의 비리프라카 신전에 들어가 서로의 입장을 소리높여 말했다는군요.


이 신전에는 원칙이 있는데요,


상대방이 말할 때는 결코 자신은 말할 수 없었답니다.


난 곰곰히 생각합니다.(물론 이 부분에서는 웃음이 비져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방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그래도 어젯밤까지 한이불을 덮고 잔 이 사람이 말하는 걸 어쩔 수 없이 듣다보면


그제서야 혹 가졌던 오해도 풀릴게고,


'그래 니 마음이 그랬구나. 난 이랬단다' 머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지 않겠습니까


그럴려고 비리프라카 여신의 귀는 그 못생긴 얼굴만큼이나 큰 귀를 갖고 있었던 건가 봅니다.



아마도 아내는 동도 트기 전, 부스럭거리며 과원에 나가는 날 보며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아내는 그 벅찬 노동을 이기지도 못하는 체력으로 근근히 버티는 날 보며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지쳐 곯아 떨어진 나의 베게를 고쳐 베어주며 혹 눈물 한방울쯤 몰래 훔치진 않았을까.


된서리 하얗게 내린 이른 아침,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신문을 들고 과원으로 걸어오는 그 풀밭길이 얼마나 뿌듯했을까.


고된 노동을 벗어던진 그 냄새나는 양말을 빨며 아내는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빨랫판을 두드렸겠지.


새로이 과원을 준비하고 너무 기뻐 며칠을 잠못들던 날 보며 듬직하고 믿음직한 가장이라고 기꺼워했겠지.



난 아내를 생각합니다.


과원 앞산에 붉은 해가 아직도 걸려 눈이 시린, 노동을 끝내기엔 살풋 이른 시간.


서둘러 집으로 갑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따라부르며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서양식 아이스크림가게에 들러 서툴게 이것저것 주문합니다.


"어이~! 마누라 밥만 먹고는 못사는것이여, 오늘밤 내가 끝내줄께. 충성을 다한다니께. 한번 믿어봐 ^___________흐흐___________^



정읍농부 미루사과






2009-06-07 00: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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