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아파트가 우리나라 주거유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도시야 말할 것도 없고, 평평하고 너른 시골들판에도 고층아파트가 마치 남근석처럼 우뚝 솟아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니까. 아파트는 우리나라 주거유형의 절대강자이다. 정부의 주택정책이란 건 곧 아파트 정책이고 주택문제는 아파트 문제다. 그런 거대한 개념뿐이 아니라 집의 형태도 아파트를 열심히 쫒고 있다. 단독주택도 아파트처럼, 연립주택도 아파트처럼, 다세대주택도 아파트처럼, 모든 집들은 아파트를 흉내 내고 있다. 이 따라쟁이 놀이에서 비껴서 있는 것은 헤이리 마을처럼, 건축가들이 설계하는 몇 안 되는 집들 뿐이다. 아파트는 대한민국 주택유형의 지존이다. 아파트는 뻔하다. 그래서 따라쟁이하기가 쉽다. 건축도면을 말로 풀어하기가 엄청 어렵지만 아파트는 설계도면없이 말로만 해도 그려진다. 현관을 열고, 신발을 벗고, 중문이 있으면 열고 없으면 그냥 거실로 올라선다. 보통 현관의 오른편이나 왼편 공간이 거실이고 다른 방향에 방이 있거나 욕실이 있다. 거실 모퉁이를 벽을 따라 가면 부엌이나 식당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방이 있다. 방이 둘이면 방과 방 사이에 욕실이 들어가 있다. 방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실을 통과해야 한다. 거실에만 앉아있으면 누가 들고나는지 훤히 보인다. 거실만 지키면 마치 전장의 교두보처럼 집 전체를 지켜낼 수 있다. (물론, 프리미엄급 아파트들의 평면은 사뭇 다르다. -정말 집답다 싶다. 그런데 엄청 비싸다. 집다운 집은 돈이 많아야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공간이 사람을 규정짓는다는 가설이 맞다면, 이것은 자본의 대단한 승리가 된다. 이 언설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말씀드리겠다.- 그 외 고만고만한, 우리가 아파트라고 부르는 주택들은 모두 이 평면유형과 대동소이하다) 아파트는 대량생산주택이다. 공정 하나만 절감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절약된다. 벽을 두 개 치는 것보다 한 개 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고 층고를 5cm만 낮춰도 공사비절감은 대단해진다. 그러므로 아파트의 관건은 싸게, 빨리, 많이 만드는데 달려있다. 아파트 평면과 형태는 이 원칙에 아주 충실하다. 벽 하나라도 덜 치고 단순명료하게 구성한다. 아파트가 똥똥한 사각형인 이유는, 이 형태가 가장 품과 재료를 덜 먹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원리인데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지금 당장 종이를 꺼내들고 계산을 해보시라. 가로세로 1m에 높이 1m짜리 정사각통을 만들면 수직벽은 총 4제곱미터가 된다. 바닥면적은 1제곱미터다. 그런데 가로 4m, 세로 25cm 높이 1m인 직사각통을 만들면 수직벽은 총 8.5제곱미터가 된다. 바닥면적은 똑 같은 1제곱미터인데. 같은 면적인데 벽량은 2.125배가 된다. 이것을 집이라 생각하면 같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정사각형보다 직사각형이 돈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대이윤은 똥똥한 집을 지어야만 달성할 수 있다. 그러니 아파트들이 똥똥할 수밖에. 그걸 눈가림하는 게 현관입구정원이니 아트월이니 뭐니 하는 난리법석이다. 이것이 면적으로만 집을 계산하는, '평수'라는 속임수의 실체다. 이런 아파트가 워낙 지천에 많아지다 보니까 사람들은 아파트 만드는 기본원칙은 모른 채, 집은 이렇게 지어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해버린다. 아파트가 주거유형의 모범타입이 되어버리는 거다. 그래서 단독주택이든 연립주택이든 다세대든 뭐든 간에 집은 일단 아파트 평면유형대로 지어버린다. 심지어 전원주택까지도. 이해는 한다. 알고 있는 집이라고는 아파트뿐이니까. 경험한 게 그것뿐인데 그대로 하는 거지 뭐. 귀농하는 이들이 모든 걱정 제쳐놓고 팔 걷어 부치고 맨 처음 하는 일이 내 손으로 내 집 짓기다. 집으로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고 집 만드는 이들의 횡포와 무성의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귀농도 하기 전에 내 손으로 내 집 짓기 꿈부터 꾸는지 이해는 되지만, 이해보다 백배는 걱정이 앞선다. 저러다가 저 좋은 곳에 아파트 짓고 말텐데... 이런 분들의 일성은 이렇다. 아파트같은 닭장 집이 아닌, 내 가족이 사는, 사람 사는 집다운 집을 짓고 싶다! 좋은 말씀이다. 집다운 집은 사람이 그 안에서 살고 웃고 떠들고 울고 사랑하고 죽는, 그런 집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통나무로도 짓고 황토로도 짓는다. 문살도 그럴듯하게 내고 불 때는 온돌도 만든다. 집 짓는 동안의 속상함, 고통, 불안감은 일단 내려놓고, 완성된 집 안에 들어가면 은은한 나무향내, 흙냄새에 집 정말 잘 지었다 싶다. 이제 열심히 농사짓고! 평화로운 삶 엮어내고! 이러면 된다! 귀농만세! 그런데 어라 현관 옆 거실, 한쪽에 방 쪼르르, 거실반대편에 부엌, 부엌 옆에 욕실, 어디선가 봤던 형태인데 맞다. 아파트다. 아파트 평면형태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재료가 콘크리이트, 시멘트 벽돌, 시멘트 미장이 아닐 뿐 내부의 생긴 모습은 아파트 그대로다. 현관문만 잠궈 버리면 외부와 불통상태로 만들 수 있다.거실 앞의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바깥풍경은 근사하지만 그것은 집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풍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아파트의 특성 그대로 외부와의 소통은 완전히 차단된다. 거실에 앉아있으면 집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누가 들고나는지 훤히 다 보인다. 자, 이 집은 시골집일까, 전원주택일까, 아니면 짝퉁아파트일까. 폭포 옆에 집을 짓자면 두 가지 골칫거리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폭포수의 소음, 하나는 말도 못하는 습기. 그래서 집을 꽁꽁 싸맨다. 문과 창을 닫으면 소음은 물론 습기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폐쇄구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집이 폐쇄구조가 되면 어지간한 것은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들락날락하면 외부의 소음과 습기를 막을 방도가 없으니까. 그래서 자연히 집은 커진다. 안에서 다 해결해야하니까. 도시는 폭포 옆과 같다. 소음은 기본이고, 습기 대신 분진이 가득하다. 폐쇄구조로 집을 짓지 않으면 곤란하다. 도시에서 집짓기는 폭포 옆에 집짓기하는 것과 똑 같다. 도시의 주택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이 아파트다. 아파트의 근원이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아파트의 건축방식과 형태는 도시의 주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아파트는 폐쇄구조로 설계하고 시공해야 한다. 외부와의 완전차단, 완벽방음, 게다가 예전엔 집 마당에서 했던 활동까지 다 집안으로 수용해야하니까 가구도 많아지고 면적은 점점 더 늘어난다. 집안에서 모든 게 해결되니까 외부와 소통할 필요가 없다. 더 꽁꽁 닫는다. 더 닫으니까 소통은 더 없어진다. 소통이 더 없어지니까 집은 더 커진다. 사람은 원래 좁은 공간 안에 갇혀있으면 답답해죽는다. 교도소 징벌방이 한 평이 채 안 되는 이유가, 그 방에 가두는 것 자체가 대단한 벌이기 때문이다. 폐쇄구조라면 모름지기 집은 커야 한다. 그래서 점점 더 커진다. 중대형아파트가 일반수요가 되어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 사람들의 욕심이 아니다.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려면 밀폐감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자본이 놓치지 않고 이용해서 이익을 올리는 그 행위가 나쁜 것이지 도시에서 큰 면적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쁜 게 아니다. 도시에서 아파트가 시작되었고, 도시의 집이 커지는 이유는 바로 이거다. 도시의 집은 폐쇄구조라야 하고 폐쇄구조이기 때문에 큰 면적이 필요하고, 빽빽한 도시에서 큰 면적의 집을 짓자면 집을 수직으로 포개는 수밖에 없다는 것. 시골은 폭포 옆이 아니다. 도시가 아니다.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방어형태로 집을 지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폐쇄구조로 집을 지으면 시골에서는 불편해서 못 산다. 낫, 호미, 괭이, 삽날을 벼리고 가는 걸 집 안에서 하나 농사 짓고 흙투성이 된 옷과 장화는 어디서 벗어 현관 열고 거실 지나 욕실에 가서 그 사이에 푸슬푸슬 떨어진 흙은 어쩌고 진공청소기로 우아하게 빨아 댕기면 되나 파종할 씨앗들은 어디에 두고, 수확한 고추는 어디서 말리고 마늘은 어디서 다듬어 거실에서 농기구는 어디다 보관하고 소소한 수리는 어디서 해 그것도 거실에서 물론, 바깥에 마당이 있으니까 거기서 하면 되지 굳이 거실에서 그 작업을 할 필요가 뭐 있어 억지 부리지 마!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시라. 바깥의 마당, 이런 저런 작업을 퍼질러 앉아서 하기 괜찮은 공간인지. 데크라는 우아한 공간이 있으니까 거기서 하면 된다고 실제로 데크에 서 보시라. 거기가 차 마시고 우아떨기에 좋은 공간인지 작업하기에 좋은 공간인지 담박 아실게다. 우리나라의 주거유형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좌식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신발 벗고, 양말 벗고, 맨바닥에 앉아서 뭉개는 거다. 일본 빼고 그 밖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의 주거유형은 입식생활이다. 신발 신고 그대로 침실까지 직행하는 거다. 심지어 신발 신고 침대 위에 올라서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농가는 우리나라 도시에 있는 집과 거의 같은 형태이다. 현관 열면 집안의 모든 내장이 다 드러난다. 농사짓고 흙투성이 된 장화 신고 그대로 들어와서 식탁에 앉아서 밥 먹고 할 짓 다한다. 입식생활에서는 도시나 시골이나 생활 패턴이 별다르지 않다. 이 서구주거유형의 패턴을 기본으로 만든 것이 아파트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서구주거유형을 들여온다고 해도 이 뿌리깊은 좌식생활은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신발 벗는 현관이다. 이러니, 이 유형은 도시에서는 아주 잘 정착된 유형일지 모르지만 시골에는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유형이다. 신발을 벗고 안 벗고는 대단히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외부활동이라고 해도 도시에서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거의 없고, 그런 노동이 있기는 하지만 집 안에서 그 노동이 연장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므로 도시의 집은 노동의 연장선에 있지 않아도 되며, 휴식과 재충전의 장소로 기능할 수 있게 구성한다. 이것이 도시의 집이다. 그러나 시골은 다르다. 노동과 휴식, 생활이 공간으로 구분되어져 있지가 않다. 집은 노동의 공간이며 곧 휴식의 공간이다. 집은 노동하는 장소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노동의 준비와 마침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골집은 노동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생활양식인 좌식생활이 유지되려면 내부공간과 반내부, 반외부공간은 필수조건이다. 신발 신은 채로 집에서 노동을 정리하고 비로소 신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시골집은 도시집과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의 전통농가들을 보면, 모든 방들은 직접 외부로 통하고 신발 신은 채로 걸터앉아 뭉갤 수 있는 툇마루, 대청이 있고, 처마를 길게 내뻗어서 농기구 수리하고 씨앗 다듬다가 비가 와도 허둥지둥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마당은 안채와 사랑채로 적절히 막혀 있어서 고추를 널어놔도, 멍석을 깔아둬도 안정적이다. 마음이 편하다. 우리전통 건축을 선의 아름다움이네, 나무와 흙의 조화네 물질만 보고 좋아라들 하지만, 이런 형태를 취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삶의 형태와 집의 형태를 맞추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노동하는 장소를, 노동이라는 삶의 행위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놓은 거다. 시골집의 바깥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이다. 시골집의 마당은 정원이 아니라 집 안의 연장이다. 이 중요한 집 밖의 공간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시골집 만들기는 실패하는 거다. 그러기에 시골집은 클 이유가 없다. 거실이 넓어봐야 거기에서 풍경 감상하며 뭉갤 이유가 없다. 바깥과 잘 소통하고, 내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깥이 훨씬 중요한 집이 시골집이다. 그래서 시골집은 폐쇄구조가 아니라 개방구조라야 한다. 근사하게 폼 잡자고 개방구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시골에서 일하면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개방구조로 만드는 거다. 우리네 전통집들이 안채, 사랑채, 대청, 툇마루, 앞마당, 뒷마당으로 자갈자갈 쪼개진 것이 괜히 그런 거 아니다. 그렇게 해야 시골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시골집에 필수요소인 바깥이 없다. 내부에 반한 외부가 있을 뿐이다. 아파트는 바깥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아파트 식의 집을 시골에 옮겨 놓으면 당연히 바깥 공간에 대한 배려는 없다. 바깥은 그저 바깥, 좀 더 깊게 말하면 환경을 타자화하고 그에 대한 방어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 아파트 식의 집들이다. 전원주택이 원주민들의 집과 상치되고, 전원생활을 하는 이들이 원주민들과 겉도는 이유가 바로 집 때문이다. 꽁꽁 닫아 둔 집에 사는 사람들과 무슨 소통을 하고 무슨 노동을 함께 하겠는가. 마치 식민모국에서 온 정착민들이 식민지원주민들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과 다를 바 하나 없다. 도시는 식민모국이고 시골은 식민지라는 계급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전원주택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아파트 식의 집이 시골살이에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그러므로 전원주택은 시골살이를 위한 집이 아니다. 전원주택은 시골에 가서 일 안하고 풍경만 감상하기 좋게 만든, 한세대용의 아파트일 뿐이다. 삶의 뿌리를 시골로 옮기려고 한다면, 아무리 내 손으로 내 집 짓기를 한다고 해도, 아무리 통나무로, 흙으로 집을 짓는다고 해도 그 형태가 아파트식인 한, 시골집은 절대 되지 않는다. 전원주택이 될 뿐이다. 전원주택을 지으면 귀농이 아니라 전원생활을 할 뿐이고, 시골에 삶을 녹여내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귀농은 실패한다. 내 손으로 내 집 짓기 꿈을 꾸기 전에, 머리 속에서 아파트부터 탈탈 털어낼 일이다. 그 다음에 귀농해서 뭘 해서 먹고 살건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그 다음에야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집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게 집 짓는 순서다. 집은 물질로 짓는 게 아니다. 집은 마음으로, 생활로, 주변 환경으로 짓는다. 나무든 흙이든 그것은 그야말로 집 짓는 재료일 뿐, 집의 전체가 아니다. 집은 사람이다. 함부로 집 짓지 말자. 다음 글은 생태의 세 번째 이야기, 시골집짓기의 두 번째 이야기로 생태건축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출처 에듀코빌리지 홈페이지 http://educovill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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