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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농사의 기원한반도에서 농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리나라 농사의 기원을 살펴보자.
청주 소로리 볍씨. 지난 1994년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중 발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유물로 인류의 벼농사 기원은 한국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물. http://bit.ly/2DloyLv
 농사는 자연과 인간 활동의 접점이 되는 영역이다. 야생의 식물들이 인간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 식물은 생존을 위해 인간은 식량을 위해 끊임없이 상호작용해 왔다. 그 과정에서 식물은 야생에서 유리했던 생존전략과 형질을 변화시켜 서서히 작물화되어갔다.
야생종인 경우는 한 이삭에서 채취한 종자라고 해도 급변하는 자연환경 아래 살아남기 위해서 발아 시기가 모두 달랐다. 여건이 좋지 않으면 다음 해라도 아니면 그다음 해에라도 발아할 수 있도록 종자가 스스로 판단하여 발아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종을 지키기 위해서 온도와 빛을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작물은 그렇게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한 기능들이 퇴화하였다. 의도적으로 뿌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야생의 씨앗과 식물들도 점차 일괄적인 발아와 수확에 맞춰 적응하고 변화했다. 또한, 인간이 식용하는 부위가 야생종보다 훨씬 거대해지는 진화를 거듭했다. 야생종의 뿌리채소인 무나 고구마는 지하부가 크지 않았지만, 인간이 식용을 위해 재배하면서부터 지하부가 커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거의 수십 배나 비대해져 있는 것과 같은 경우다.[1]
 
선사시대의 벽화. http://www.kamat.com/kalranga/rockpain/
 농사의 기원이 되는 파종 행위는 우연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먹고 남은 열매를 버려두거나, 어떤 종교적 의미를 위한 행위를 통해서 땅에 던져졌던 열매들이 다음해에 먹을거리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하면서부터 의식적인 재배 활동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던져진 열매에서 다음 해에 발아를 하고 거기서 얻어진 열매를 따 먹고, 또 남겨진 열매에서 땅에 떨어진 씨앗들을 관찰하게 되면서, 크고 빛깔이 좋아 보이는 씨앗을 주워 보관하는 식으로 선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은 선별된 씨앗을 파종하고 열매를 거두는 행위들을 학습할 수 있었고, 야생식물들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같은 종자끼리 발아 경쟁을 통해 좀 더 빨리 발아하고 좀 더 강하게 성장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씨앗의 선별과 파종이라는 행동을 습득한 인류는 서서히 농경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시기는 지구가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다양한 생명체의 활동이 왕성해졌던, 신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이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의미가 있는 변화로,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 혁명으로 일컬어지며 앨빈 토플러는 이를 제1의 물결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집트 벽화에 나타난 가축을 길들여 농사짓는 모습. http://sojoong.joins.com/archives/802
 농경사회로 접어든 인류는 혁명이라는 말 그대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옮겨 다니면서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취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정착한 인간들은 서서히 군락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잉여 농산물을 발생시켰고, 이는 단순히 필요에 의한 맞교환의 형태를 넘어 유통경제를 탄생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또한, 축적을 통한 사유재산이 형성됨으로써 신분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분쟁을 해소할 수 있는 규범이 필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약 7,000년 전에 도시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는 근대 국가의 기틀이 되었다.[2]
 
대천리 벼껍질 http://bit.ly/2u0ob9Y
 한반도지역에서는 발견된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서 기원전 3,000년 이후에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옥천 대천리 신석기유적에서는 기원전 3,500~3,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보리, 밀이 발굴되었고, 진주 평거동 신석기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2,7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조, 기장, 콩속 종자, 팔속 종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고성 문암리 신석기유적에서는 상하 2층으로 구성된 밭 하층이 발굴됨으로써, 그 밭이 형성된 시기인 약 5,000년 전부터 농경문화가 본 궤도에 올라 있었음이 확인되었다.[3]
 
대천리 집터유적 http://bit.ly/2u0ob9Y
 특히, 청원 소로리 볍씨유물이 발견됨으로써 그 동안 우리의 벼농사가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학설을 뒤집고,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먼저 벼 농사가 시작된 곳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는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모두 59톨로 확인됐고, 볍씨뿐만이 아니라 이 유적 일대에는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습됐다. 출토된 볍씨는 야생 벼가 아닌 재배 벼였다. 고대 우리나라에는 야생 벼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한 경작의 흔적이었다.
서울대학교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실험과 미국 지오크론시험소 유전자 분석결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옥천암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2천~4천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로리볍씨 http://bit.ly/2pzJzNU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곧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하기 끝 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 또 그 벼가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밝혀져 1만 5000년 전 학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볍씨를 분석한 교수들의 연구 결과, 소로리 볍씨는 재배 벼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03년도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미유전학회≫에서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초의 볍씨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4]
 
[1] 재배식물의 기원(다나카 마사타케)
[2] http://sojoong.joins.com/archives/802
[3]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김용섭)
[4] 조선pub (2015.11.12.)

이경희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18.03.1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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