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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공예가의 지리산 골짜기 생활 17년“스물네 살에 들어와 어느덧 마흔 하나가 됐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지리산에서 장인 정신으로 목다구를 만드는 목공예가 김용회씨.

 

귀농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1989년,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로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간 목공예가 김용회 씨. 시골에서 도시처녀를 만나 결혼도 하고, 집도 짓고, 자기가 원하는 일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김씨의 나무 사랑 & 지리산 사랑.
2005년 가을 어느 날 저녁, 경남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에 있는 자연농업문화센터(자연을 닮은 사람들)에서 조촐한 파티가 있었다. 석류나무와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은 폐교의 정원에서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이들은 방송국의 취재 요청에 의해 일부러 짬을 내 모였다. 도시에서 살다 하동에서도 풍광이 뛰어난 악양면에 들어와 둥지를 틀은 이들의 귀농 후 삶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해서다. 방송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마침 귀농인들끼리 상견례의 장도 되었다.

 

30여명이 모였다. 전직도 다양하고 시골에 들어와서 하는 일도 여러 가지다. 언론인, 대기업 임원, 교사, 화가, 사진작가, 목수 등등. 그 가운데 아이를 데리고 참석한 김용회(41세) 문혜아 씨(33세) 부부는 누구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행복해보였다.

 

한사람 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김씨는 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사람들 앞에 섰다. 김씨는 “저는 목공예를 합니다. 화개에 들어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고, 결혼도 했으니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건장한 체격의 김씨는 꽁지머리에 안경을 썼다. 그 옆에 도회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운 부인은 다소곳이 웃으며 서 있었다. 김씨를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의 차실에 전시돼 있는 목다구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 이듬해 2006년 1월 구정 직전, 김씨에게 전화를 넣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그가 일러주는 대로 하동의 악양 면사무소를 지나 ‘조씨 고가’를 끼고 마을 안길로 해서 산 쪽으로 조금 올라갔다. 차가 한 대 다닐 수 있는 길가에 그의 집이 보였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상신마을이다. 집 앞이 너른 논과 밭이다. 푸른 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집 앞 멀찌감치 거대한 지리산 자락이 지나가고 있었다. 김씨의 집은 전망이 환히 트인 아늑한 자리에 있었다.

 

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를 차실로 안내했다. 천정이 낮은 자그만 방에 나무로 만든 각종 차 도구들이 즐비했다. 목다구(木茶具 )이다. 나무로 만든 차도구란 말이다. 물고기 모양도 있고, 버선 모양도 있고, 스키처럼 휘어진 것도 있다. 모두 수제품들이다. 하나같이 고품스럽고 세련돼 보였다.

 

가로로 길게 난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방안에서 논밭이 보였다. 커다란 찻상을 앞에 두고 앉은 김씨는 의례적으로 찻물을 끓일 준비를 했다. 대개들 전기포트를 쓰는데 김씨의 포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쇠화로에 열선 코일을 깔았다. 부산의 쪽 염색하는 이가 만들어주었다고. 운치가 있어보였다. 김씨의 머리 뒤로 목다구 전시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의 작업장. 요즘같은 겨울철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

 

김씨가 따라주는 차를 마셨다. 김씨는 차 도구를 만드는 공예가답게 차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는 일찌감치 차를 접했다. 해마다 주변의 차밭을 소유한 지인들이 그를 찾아와 자신들이 만든 차에 대한 품평을 듣고자 한다. 주위에서 김씨가 권해주는 차들이 좋다고 해서다. 한마디로 김씨가 좋다고 하는 차가 곧 상등품이란 뜻이다.

 

“좋은 차는 입에서 받치는 맛이 없어야 해요. 차는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해요. 그 다섯 가지가 입안에서 어우러지면 아무런 맛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서도 다 마시고 나면 여운이 남는 차를 좋은 차라고 말할 수 있어요. 가령 쓴맛이 난다면 그건 좋은 차라고 하지 않습니다.”

 

찻상 위에 차탁(찻잔 받침)들이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육면체의 모서리가 각진 듯 하면서도 부석사의 배흘림기둥처럼 부드럽게 흘러 내렸다.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이며 가격을 물었다. 5개 한 세트에 10만~15만 원이란다. 찻잔을 받치는 받침대 하나가 2~3만 원. 순간 일개 나무쪼가리에 불과한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목다구에 쓰이는 고목들을 보관해두고 있다. 보수하는 절이나 철거하는 한옥에서 구한다.

 

그러나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뜯어보니 뭔가 다르긴 다르다. 나뭇결이 맑은 연못을 보는 듯 투명하고, 쇠처럼 단단하면서도 화투장처럼 사뿐했다. 충격을 주면 서릿발이 부러지는 듯한 명증한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때깔도 은은한 게 밑바닥서부터 우러나오는 색깔인 듯 했다. 역시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정성이 안 들어가면 태가 안나요. 하루에 한 세트를 만듭니다. 인건비에 불과하지요. 그것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놓지를 않아요.”

 

하루에 한 세트라지만 그 전의 공정이 길다. 나무만 가지고 2, 3일 간다. 나무를 말리고 켜고 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면 한 세트 완성하는데 며칠이 걸리는 셈이다. 김씨는 나무의 재질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사포가 정교하지 않으면 안 나간다고. 박달 다듬이에서 4, 5세트가 나온다. 그것도 바로 산에서 베어온 나무가 아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다듬이로 사용해온 나무여야 한다. 오랜 세월 두들김을 당해 결이 엉키고 조직이 치밀해진 놈으로 만든다. 대추나무는 20~30년 묵어야 쓸 만하다.

 

“오래된 나무가 아니면 요즘 같은 도시 생활공간에서는 뒤틀리고 터지고 합니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의 집앞이 바로 산과 밭이다. 지리산은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김씨의 작업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그런 고목들을 구하는 것이다. 고가의 툇마루나 디딜방아 등이 좋은 소재들이다. 보수하는 절에서 쓸 만한 고목들이 많이 나온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니 이 곳 저 곳에서 연락이 온다. 전국 어디든 1톤 트럭을 타고 직접 달려가서 싣고 온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고목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김씨의 작업장 옆에는 그렇게 해서 구해다놓은 고목들이 가득 쌓여 있다. 마치 한옥을 분해해 놓은 듯하다.

 

그가 쓰는 나무들은 대추나무 느릅나무 괴목 소나무 소뚜레나무 가죽나무 감나무 돌배나무 살구나무 등이다. 그 가운데 가장 멋지게 보이는 것이 먹감나무이다. 감나무의 일종으로 나무 속에 검은 색이 들어가 있어 귀족스럽고 장중한 맛을 준다.

 

 

www.jadam.kr 2006-02-05 [ 이창수 ]
다양한 디자인의 차시들. 물고기, 베틀북에서 힌트를 얻었다.

 

김씨가 만드는 차 도구는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차시, 포자, 말차시, 차탁, 소반과 찻상, 차 뚜껑받침, 개반, 다식접시, 차 긁개 등 차칙(차 도구 일체)을 만들어 판매한다. 다구장도 만든다.

 

차 도구하면 사람들은 대개 자기로 구운 찻잔이나 다관 정도만 알고 있다. 그러나 김씨가 만들고 있는 차 도구들도 차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단순히 찻잔을 받치는 기능적인 구실을 넘어 다도의 기품과 분위기를 돋우는 액세서리 역할까지 충분히 해왔다. 일본의 경우는 차 도구가 무척 발달해있다.

 

김씨는 목다구 만드는 일을 96년부터 해왔다. 전시회도 여러 차례 했다. 개인전, 그룹전 등등해서. 그의 작품들은 서울 강남의 차도구 전문숍이나 호텔 기념품점, 인사동 등지에서 고가로 팔려 나간다. 인사동에 가서 하동에 목다구 만드는 이를 아느냐고 물으면 웬만한 가게 주인들은 고개를 끄덕인다고. 그만큼 전국에서 그의 솜씨를 알아준다.

 

 

www.jadam.kr 2006-02-05 [ 이창수 ]
차탁. 선이 생명이다.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렸다.

 

“목다구 만드는 일은 시간 보내기가 참 좋아요. 그렇지만 돈과 연결시키면 골 아프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우리의 전통 생활필수품과 자연에서 디자인을 얻는다. 그래서 김씨가 만드는 선들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가 보다. 언젠가 지인이 김씨에게 “형의 것은 선이 참 고와, 비결이 뭐유?” 라고 물었다. 김씨가 대답했다.

 

“지리산에 살면 다 알게 돼. 굳이 찾아서 쓸려고 안 해도 산의 굴곡, 섬진강의 물결 주변의 모든 아름다움이 들어오지. 선을 일부러 만들면 부담스럽거든. 일상적인 것들 고무신, 베틀북, 차나무잎, 처마의 선도 모두 선이 되어버려. 잘 보면 곧은 것 같지만 조금씩은 다 곡선이 있어 그게 맛이지.”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의 전시 포스터. 청오는 김씨의 호로 푸른오동나무란 뜻이다. 고교시절 교사가 지어준 것이다.

 

미술비평가 김종길 씨(경기 문화재단 전문위원)는 김씨의 목다구 작품에 대해 이런 평을 했다.

 

“청오(김용회 씨의 호)는 우리의 옛스러움 속에서 혹은 자연에서 다구의 모양새를 찾아낸다. 할머니가 신고 있던 버선에서 차시를 찾아냈고, 섬진강 물고기에서 찻상의 형태를 찾아낸다. 때로는 아주 정교한 사포질로 나무가 가진 본래의 문양을 그대로 살려내는가 하면 동백기름을 써서 나무의 깊은 색을 우러나게도 한다. 대나무는 암대나무와 오죽을 즐겨 사용했으나 요즘은 묵은 나무를 사용한다. 툇마루나 오래된 고가에서 나온 나무를 쌓아두었다가 나무 속에서 보여지는 형태가 찾아지면 그때 찻상이나 차시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보니 그의 다구들은 정겹고 정갈하며 오랜 나무의 깊은 향기를 가진다. 단순히 차도구로서 다구라기보다는 그것 하나를 보아도 좋을 만큼 훌륭한 조각품이 되는 것이다. 청오는 15년의 세월을 오직 다구 제작에 매달려왔다. 다구의 맥이 끊겨진 상황에서 시간을 거슬러 그것을 복원하고 한국적인 멋을 담아내기 위해 수제작의 수고로움을 감내했다.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살아나고 있는 그의 다구를 보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차를 알리고 사랑하며 살아 간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아궁이에 불을 때는 김씨. 아궁이불로 난방도 하고 온수도 사용한다.

 

모악산 기슭에 살다가 악양으로 들어간 시인 박남준 씨는 김씨를 아끼는 지인 중 한사람이다. 박씨는 자그만 시골집에서 혼자 지낸다. 그는 청매화가 피는 봄날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청매화 꽃송이를 찻잔에 띄우고 매화 향내 그윽한 차를 마시는 풍류를 아는 작가이다. 술 한 잔에도 꽃잎을 띄우는 감성적인 박씨는 김씨가 살구나무로 만든 찻잔 받침을 쓴다. 박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좋은 나무들의 향내에 파묻히는 것을, 풀풀거리며 날리는 톱밥 내음을 온몸에 뒤집어 쓰는 걸 기꺼워 하는 그가 만든 작품들, 그의 장인 정신의 손길을 거친 차 도구를 쓰며 마시는 차 맛이 어찌 각별하지 않겠는가.”

 

인천 출신의 김씨는 원래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는 인문계를 다녔다. 그러나 중간에 그만 두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 말고도 더 넓고 멋진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련 없이 학교 문을 나섰다. 보던 책들도 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런 책들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읽었다. 도시의 번잡함도 싫었다. 책가방 대신 그림 도구를 둘러메고 산을 찾아 다녔다. 전국의 산을 다녀보다가 지리산에 반했다.

 

1988년 12월 말,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김씨는 지리산에서 해돋이를 맞기로 했다. 이듬해 1월1일 청왕봉에서 해돋이를 보고 내려왔다. 그리고 폭설이었다. 눈 덮인 지리산과 화개 골짜기에 충격을 받았다. 쌍계사 위쪽, 칠불사, 의신 등지였다. 침엽수의 고고함과 활엽수의 실타래 같은 잔가지들 그리고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빚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설경에 혼이 얼어버릴 정도였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의 부인 문혜아 씨가 구정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 바우의 모습이다.

 

화개면 모암마을에 들어서자 추위에 얼었던 몸이 이상하게 훈훈한 기운에 녹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김씨는 “마을에 들어가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했어요.”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같은 해 그는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화개를 찾았다. 모암마을에 기거하며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조성된 차밭과 지리산의 환상적인 능선을 그렸다. 농부들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행복했다. 그러나 너무 젊었다. 젊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별수 없이 사람이 그리웠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웃고 떠들고 싶었다.

 

“인천을 가려고 구례역으로 갔어요. 그런데 역에서 표를 끊고 나니까 갑자기 가고 싶지가 않더군요.”

 

어차피 구매한 표여서 일단 인천에 올라갔다가 다시 화개로 내려왔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있을 때까지 있어보자고 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물네 살의 총각이 그 사이에 마흔 하나의 중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되진 않지만 내가 저 나이에 무슨 생각을 하고 들어왔는지...하는 마음이 들어요.”

 

 

www.jadam.kr 2006-02-05 [ 이창수 ]
김씨 부부. 김씨의 전시회 팸플릿에 실린 사진이다.

 

그림을 그리던 그가 목다구로 방향을 튼 건 불행한 사건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의 작품이 몽땅 도난을 당했다. 그의 집을 한 번 와봤던 자의 소행이었다. 후에 그의 그림들은 대구 등지에서 발견됐다. 물론 그림에는 다른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일로 인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 그림들이 자신만이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림을 버리고 대신 차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화개에는 차 도구를 만드는 이들이 몇 있었다. 소재는 대나무였다. 그들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하나둘씩 떠나고 현재는 김씨 혼자 남았다. 그는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마음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늦게 결혼했다. 2000년에 했다. 당시 35세였다. 상대는 대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문혜아 씨였다. 당시 27세였다. 문씨는 하동에 귀농한 어느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가 마침 시인의 집에 들른 김씨와 대면하게 됐다.

 

김씨에 의하면 “아내 쪽에서 먼저 신호가 왔다”고 했다. 문씨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문씨가 인터뷰를 원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찌됐든 그 후 두 사람은 1년 여간 힘겨운 교제를 했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 문씨의 집에서 들고 일어났다. 김씨가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집 한 채 없이 산골짜기에서 지내는 노총각 신세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문씨의 확고한 의지와 두 사람의 사랑으로 고비를 넘기고 이듬해 둘은 하나가 되었다. 둘 사이에 두 아이(6세, 3세)가 있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가 최근에 지은 집. 왼쪽이 차실이고 가운데가 본채, 트럭 뒤가 작업장이다.

 

문씨는 도시 출신이다. 김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시골에 들어가 살 거란 상상도 안했을 것이다. 과연 직접 부딪친 시골 생활은 어땠을까. 김씨는 이에 대해 “잘 적응을 하던 대요. 시골이라고 특별히 힘들어 하는 거 없었어요.”라고 대변해주었다. 문씨는 시골에서의 문화적인 갈등도 겪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어디를 가나 붙어 다녔다. 김씨와 어울리는 이들이 바로 시인, 작가, 예인들 즉, 문화 그 자체인 탓에 갈증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결혼 후 초창기엔 원하는 만큼 돈을 갖다 주지 못해 그게 미안했어요. 그 외에는 다 만족해하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최근에야 집을 지었다. 예술을 추구하는 이답게 멋지게 지어놓을 줄 알았는데 평범했다. 실용을 우선한 듯 했다. 마을 한가운데 살아 위화감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오랜 시골 생활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 몇 번 하고나니까 땅 사서 집 지을 만큼의 돈이 마련되더군요.”

 

126평의 땅에 차실 9평, 본채 17평, 작업장 8평 등 세채를 지었다. 김씨가 설계하고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지었다. 원래는 흙집을 지으려 했으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아 포기했다. 건축비만 3천여만 원이 들었다. 우사였던 차실은 낮은 천장의 원룸 스타일이다. 손님도 맞고 다구도 전시하는 장소로 쓰인다. 살림을 하는 본채는 방 두개에 입식 주방을 갖추었다. 집 밖에 있는 아궁이에다 불을 때면 방도 뜨뜻해지고 물도 데울 수 있도록 시설을 해놓았다. 난방비가 파격적으로 절약된다고.

 

김씨의 작업장은 살림집 바로 옆에 있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오전 10시 쯤 작업장에 들어가 저녁 6시 쯤 일을 끝낸다. 블럭으로 쌓아 올려 만든 작업장엔 기계와 연장들, 나무와 톱밥이 가득했다. 그는 혼자서 나무를 재고, 켜고, 다듬고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 시간이 행복하다. 오래된 고목에서 나오는 향기도 좋아한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는 일찍부터 차를 접했다. 차맛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김씨는 17년간 시골에 살면서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해 한다. 일찌기 제도권 학업을 그만 둔 것도 후회되지 않는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그 가운데 대기업에서 높은 보수를 받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들조차 이제는 김씨를 부러워한다고. 김씨는 시골 생활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좋다고 말했다.

 

첫째, 남하고 비교를 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두번째, 내 시간을 내가 알아서 쓴다. 세번째, 산이 눈앞에 있다, 자연이 편안함을 안겨준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이유 중 좋은 사람들이란 화개와 악양 등지에 사는 지인들을 말한다. 시인, 산 타는 여자, 천연염색 하는 이, 도자기 굽는 도공... 거기다 지리산에 들어간 이들을 취재하러 이곳에 내려왔다가 필이 꽂혀서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합류한 이도 있다.

 

김씨를 비롯한 이들은 화개 벚꽃길과 계곡, 구례의 산수유 골목, 섬진강, 평사리 벌판 등지를 거닐며 살겨운 정을 쌓아오고 있다.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예술과 사랑과 인생과 자연을 얘기한다.

 

김씨는 좋은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지리산 골짜기 생활에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www.jadam.kr 2006-02-05 [ 오현주 ]
김씨 마을에 있는 조씨고가. 1840년 무렵 영의정을 지낸 조계의 손자가 소나무를 쪄서 지었다.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02.0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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