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화선생님의 우리 역사 바로 보기 - 연재 1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민족의 역사는 광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인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대한민국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역사를 왜곡 조작하고 있으며, 일본 또한 제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획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제도권 역사학자들은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과 사유에서 벗어나 서양의 연구방식과 서양의 가치 척도로 한국사를 연구하고 있다. 게다가 연구가 어려운 상고사나 고대사, 심지어 중세사에 대한 관심은 제쳐두고 비교적 연구가 수월한 근세사와 현대사에 몰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위정자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데 한국사를 학교교육에서 선택과목으로 다루도록 방치하고 있고, 교과서 편찬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대륙에서 반도로 도읍을 옮긴 세종대왕
한국사의 정사로는 우선 조선(1392~1910)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고려(918~1392)의 역사서인 고려사,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서술한 삼국사기를 꼽을 수 있다. 어느 사서보다도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삼국사기는 한국사의 기본사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사서가 오늘날 우리 나라의 제도권 사학자들에게는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조선왕조실록은 그런대로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몰라도 고려사나 삼국사기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수가 엄청나게 적은 것이 현실이며, 삼국사기는 거의 외면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 그럴까 고려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오늘날 우리 나라의 제도권 사학자들이 철저하게 믿고있는 반도사관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도사관이란 우리 나라의 역사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설인데, 고려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은 반도사관을 입증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반도사관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반도사관이 우리민족의 역사관으로 자리잡은 것은 세종 후기 이후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반도사관은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고, 세조 때 강압적으로 강요된 후 성종 때에 이르러 자리잡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 초까지도 조선의 중심 강역이 대륙이었고, 세종 중기 때 조선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농사에 필요한 서적과 의학서적이 편찬된 것은 대륙과 반도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륙과 반도의 언어의 차이, 자연환경과 기후, 농사방법의 차이에서 야기되는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한반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아도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이다. 고려의 도읍지였었다는 개성과 서울에서 고려의 유적임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유적은 정말로 드물다. 특히 고려의 남경이었다는 서울에는 고려의 유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전혀 없다.
한나라의 도읍지에는 당시 제왕과 친인척들이 살던 궁궐, 사당 그리고 귀족들이 살던 대규모 주거유적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서울에서 고려의 유적을 발견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서울이 고려의 남경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도읍지는 전란을 피해 옮겨간 곳을 포함해 여러 곳이다. 건국지인 송악松嶽을 비롯, 황도皇都라 불렀던 개경開京, 몽골의 침입으로 옮겼던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그리고 합단哈丹의 침입 때 피했던 복주福州, 후기의 도읍지 송경松京과 한양漢陽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이궁과 별궁이 있었다.
반도사관으로 일관하고 있는 우리 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송악과 개경 그리고 송경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세 곳이 모두 동일한 곳으로 경기도 개성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복주는 경상북도 안동이라고 믿고 있고, 강도와 송도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두 곳이 모두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 서울이 고려 때의 한양이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려의 도읍지들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인식과 주장은 고려사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반도사관을 탈피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반도의 개성과 강화와 안동, 그리고 서울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궁궐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단지 개성에 경덕궁이라는 단 한곳이 있을 뿐인데 실상은 고려 때 축조된 것이 아니라 조선 초 태종 때(1414년) 건설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반도사관은 허구의 역사관
우리는 우리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비롯한 전 역사가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검증되지 않은 황당한 주장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대륙 산동성에서 명明에 사대事大를 맹세하고, 명의 후원하에 건국한 근세조선(1392~1910)은 세종 때에 이르러 도읍지를 산동성 제남시濟南市에서 한반도 서울로 도읍지를 옮긴다. 그후 근세조선은 대륙의 강역을 명과 왜倭에 빼앗기고 강역은 한반도로 축소된다.
결국 근세조선은 모든 역사의 강역을 한반도와 만주로 축소 이동시키면서 반도사관과 만주사관을 만들어냈다. 조선의 강역을 차지한 명도 새롭게 차지한 조선의 강역을 자신의 과거사의 강역으로 위장하면서 근세조선의 반도사관을 뒷받침한다.
이로써 허구의 사관인 반도사관과 만주사관이 만들어졌지만 어떠한 정사서에서도 반도사관이나 만주사관의 입지를 도와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일부 글자가 변조되거나 모순이 쉽게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삭제되고, 반도사관으로 해석되도록 일부 가필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역사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반도사관과 만주사관의 허구와 억지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정사서를 통해 진실을 밝힐 수 있으며 그 진실이 밝혀져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있게 되면 우리 역사는 광복되는 것이다. 그 시기가 단축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그리고 삼국사기를 정독해보자. 아울러 부도지符都誌,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신단민사神檀民史를 함께 읽으면 대륙의 심장부에서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글) 이병화(역사연구가 016-306-3002)
이병화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05.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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