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사이언티스트> 최근호는 ‘기업과학 대 대중의 알 권리’라는 특별 보고서를 통해 날로 사유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과학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몇해 전에 돈 쉘이라는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 출신 남자가 어느 날 밤 갑자기 가족을 3명이나 총으로 쏴죽이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라는 제약회사가 만든 ‘파록세틴’(paroxetin)이라는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던 것으로 밝혀졌고, 남은 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지난해 여름 800만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냈다. 대기업을 상대로 승소할 수 있었던 것은 법정에서 전문가 증언을 한 정신병학자 데이비드 힐리가 파록세틴과 관련해서 발표되지 않은 초기 시험과정의 서류를 검토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소송이 있기 전까지 파록세틴은 그동안 항우울제들이 가지고 있던 부작용을 없앤 새로운 치료제로 각광받았다.
힐리는 초기 임상실험에서 소수지만 환자들 중에서 자살하고 싶다거나 폭력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고, 건강한 자원자들의 많은 수가 이 약을 투여하는 동안 흥분감을 느끼고 투여를 중단하면 허탈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힐리는 회사 쪽이 영국의 약품규제 당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힐리는 법정에서의 증언 이외에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어떤 식으로도 발표할 수 없었다. 기업의 이익에 해가 될 수 있는 정보를 제삼자에게 밝힐 수 없다는 영국의 법률 때문이다. 문제는 이 약품의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정보가 전문가들에게 곧바로 제공되지 못하면서 환자들이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인 댄 리욘즈는 2년 전에 한 회사의 실험실에 몰래 들어가서 기밀로 분류된 과학연구 결과와 메모를 들고 나왔다. 요즈음 흔히 이야기되는 산업 스파이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는 동물의 권리보호를 주장하는 활동가이며, 그가 자료를 빼낸 회사는 이뮤트랜(Imutran)이라는 영국의 생명공학기업이다. 이 회사는 지난 90년대에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서 돼지에게서 장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수백 마리의 마카크 원숭이와 비비에게 장기를 이식하는 동물 실험을 해서 동물권 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리욘즈는 입수한 자료를 통해 이 회사가 과학저널에 발표한 논문들이 실험대상인 동물들의 생존율과 건강상태를 터무니없이 과장했으며, 실험과정에서 동물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욘즈는 그 사실을 공표할 수 없다. 법원의 명령에 의해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정보를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는 이발사 신세가 된 셈이다. 리욘즈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이 동물뿐 아니라 대중의 이익과 알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고 당연히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뒤 영국 정부는 문건을 검토하고 “부분적으로 동물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준 사실이 인정된다”고 발표했다. 왕립협회의 ‘동물학대 방지를 위한 협회’가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역시 기업의 동의 없이 발표할 수 없다는 명령에 묶여 회원들에게조차 배포하지 못하고 있다. 과연 리욘즈는 기업의 비밀을 무단으로 빼낸 절도범인가 아니면 이뮤트랜사가 기업 이익을 내세워 대중의 알권리를 제약한 것인가
최근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의 터무니없는 약값 때문에 만성 백혈병 환자들이 ‘기적의 약’을 눈앞에 두고도 죽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사유화로 줄달음치는 과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미래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과학연구의 사적 영역의 비중은 크게 높아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전체로 볼 때 사기업들이 투자하는 연구개발비의 비중은 80년대 후반 전체 연구비의 50%를 넘어 90년대에 가파른 성장세를 지속했으며, 2000년에는 70%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2000년 현재 60%를 넘어섰다. 세계적인 제약회사 화이저는 2000년 한해 동안에만 47억달러를 연구비로 쏟아부었다. 이것은 웬만한 나라의 전체 과학연구 예산을 능가하는 엄청난 액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좌우하는 생명공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현재 여러 나라에서 제정된 생명윤리와 안전 관련 규율장치들은 정부의 연구비에 대해서만 제약을 둘 수 있을 뿐 사기업들의 연구에는 거의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과학연구의 사적 영역이 갈수록 확장되면서 국민들의 건강 증진보다는 돈벌이가 되는 일부 방향으로 투자가 집중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업들이 연구결과를 기업 이익에 종속시켜 유리한 부분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기업 비밀에 부쳐 발표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
과학의 총체적 위기로 치달아
최근 일부 국가에서는 기업들이 연구의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 것 이외에 연구과정에서 축적된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밝혀야 제품 승인을 내주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업들의 반발 때문에 공론화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칫 기업이나 연구자들이 규제가 덜한 다른 나라로 옮겨가면서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는 상황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로 팽창하는 과학의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 규제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과학은 기업에 종속되어 한낱 돈벌이 수단으로 타락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 연구기관과 대학에도 큰 영향을 끼치면서 공적 영역이 다투어 사적 영역을 벤치마킹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을 낳고 있다. 요즈음 세간에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인한 과학기술계의 위기론이 떠들썩하지만 정작 그보다 훨씬 심각한 과학기술계의 총체적 위기는 과학기술이 그 공공성을 상실하고 기업의 사병으로 전락할 위험성일 것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김동광/ 과학저술가
운영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3.07.1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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