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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땅에 대한 미련도 없다. 남의 땅에 농사 지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남보다 맛있는 딸기를 만들어내는가, 어떻게 하면 일 년 사시사철 딸기를 생산해낼 수 있는가만을 골똘하게 연구하는 농부가 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에서 딸기농사를 짓는 임창수 씨가 바로 주인공이다.
귀농하는 이들은 적게는 몇천만 원, 많게는 수억 원의 자금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걔 중에는 돈 한 푼 없이 시골로 들어가는 이도 있다. 아니 오히려 빚만 잔뜩 진 채 절망감만 가슴에 안고 고향을 찾는 경우도 있다. 충남 논산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임창수 씨(42). 그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임씨는 거기다가 건강까지 안 좋았다. 공주고를 나온 임씨는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금은 반지를 가공하는 세공 일을 했다. 세공은 화공약품을 많이 쓴다. 반지의 광을 내고 때를 빼는데 초산과 염산을 합친 왕수라는 걸 쓴다. 그게 호흡기 쪽에 안 좋다고 한다. 임씨는 십년 넘게 세공을 하면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한때는 세공으로 돈도 벌었다. 직원까지 두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지 중의 한 사람이 임씨에게 다가와 사업을 권했다. 임씨는 그 일이 잘 되면 건강을 해치는 세공 일은 안 해도 되리라 여겼다. 여기 저기 돈을 끌어다 투자했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였다. 임씨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 때 도시에서 다시 월급쟁이로 시작하는 게 싫었어요. 도시생활은 그 전부터 싫었고요. 그래서 건강도 되찾을 겸 시골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게 98년의 일이다. 당시 임씨는 35살이었다. 임씨의 아내 이은주 씨(36)는 대도시 출신이다. 시골생활은 꿈도 꾼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남편의 결정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누구보다 사업 실패의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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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수 씨 먼저 홀몸으로 논산 상월면 석종리의 부모 집으로 들어갔다. 임씨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임씨의 부모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오래동안 수도작을 했지만 가지고 있는 땅은 별로 없고 아들을 도울 여력도 없었다. 임씨는 먹고 자는 것만 부모 신세를 졌다. 부인 이씨는 세 살 네 살 된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정착지는 고향으로 정했다. 물론 고향 사람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당장 잠잘 곳도 없는 처지인지라 다른 곳은 엄두도 못냈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의 임씨는 준비를 많이 했다. 당장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고향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농사 얘기를 들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정보도 얻었다.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 알아보았다. 마침 귀농 정착금이라고 해서 저리로 융자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행히 계절도 잘 맞아떨어졌다. 임씨는 농사가 다 끝난 다음에 들어갔다. 다들 한가할 때라 물어보고 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농사가 한창일 때는 그럴 짬도 없고, 일도 중간부터 배우게 돼 시행착오가 생길 지도 모른다.
“저는 그래도 아버님이 시골에 계셔서 귀농 환경이 좀 낫다고 볼 수 있어요. 고향 친구들 하고도 어울리며 정보도 얻고, 농사도 배우고 했지요. 그렇지만 시골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분은 좀 힘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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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버섯과 채소를 해볼까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버섯으로 재미를 못 봤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손쉽고 힘이 들지 않은 채소(깻잎)로 시작했다. 귀농 자금 1,800만 원을 요긴하게 썼다. 첫해는 비닐하우스 2동에서 약 1천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재미가 나더군요. 논산은 딸기가 유명한 곳이에요. 딸기 산지에다가, 딸기 집하장도 있어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한 동을 딸기로 돌렸어요.”
딸기는 과수 중에서도 초보농사꾼이 하기 힘든 작물이다. 그러나 그만큼 부가가치는 높다. 임씨는 그 점에 착안했다. 농업기술센터에 딸기만 수십년 연구한 연구원에게 매달렸다. 자그마한 문제만 생겨도 그 연구원을 찾아갔다.
“그 분이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 잘 대해주셨어요. 저의 밭에도 오셔서 봐주시고...”
한해 두해 땅을 늘려 현재 임씨가 빌린 땅은 1,800평, 딸기 하우스가 6동. 한 동에 220평 규모이다. 임대 조건은 일 년에 쌀 22가마. 귀농 자금은 이미 갚았다. 새로 시설자금 4천만 원을 빌렸다. 이 돈은 이중 보온 장치 등 하우스 시설을 꾸미는데 몽땅 들어갔다. 하우스 한동 짓는데 비닐값만 80만 원 해서 약 600만 원이 들었다.
딸기 재배는 손이 많이 간다. 사과나 배처럼 묘목을 키워 꽃이 필 때 수정해 열매를 따는 단순 과정이 아니다. 무균묘를 분양 받아 포트에 키워 런너(넝쿨)가 나오면 그걸 땅에 묻어 뻗어나가게 한 후 꽃을 피워 열매(딸기)를 맺게 한다. 무균묘는 하나에 270원에서 600원 사이다. 한 동에 약 300묘가 들어가지만 임씨는 자라지 못할 것도 고려해 600묘를 심었다. 한 번 수확한 정식묘는 다시 못 쓴다. 새로운 묘를 심어야 한다. 3월에 하우스에서 자묘를 키워 8월에 정식,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수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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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토양관리로 땅을 1년간 묵혔다. 잡초가 나면 갈아엎고 또 풀이 자라면 갈아엎고 하면서 우분을 주었다. 욕심에 우분을 너무 주었는지 첫해 순은 잘 올라오는데 키가 짜부러 들었다. 뭐든지 적당한 것이 좋다.
첫해에는 관행으로 지어 3,5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듬해 농약을 치지 않자 수익이 2,200만 원으로 줄었다. 요즘은 관행 반 자연농업 반으로 짓는다. 딸기는 kg 당 24,000원에 서울청과로 나간다. 연간 수익은 약 3천만 원 선. 빚도 갚고, 농기구도 사야 해 여전히 쪼들리는 생활이다.
“딸기는 로터리를 몇 번씩 쳐주어야 해요. 한 차례 수확이 끝나면 그 묘는 다 걷어내고 다시 묘를 길러서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트랙터가 있어야 해요. 그거 빌리는 값만도 2백만 원이 넘거든요.”
임씨는 아직 집이 없다. 농막에서 지낸다. 콘테이너 2개를 합쳐 난방 시설을 했다. 씽크대, 샤워시설 등 살림집으로 만드는데 콘테이너 값을 포함해 약 340만 원이 들었다. 그렇지만 모든 게 불편하다. 밥 짓고 빨래하고, 설거지 해야 하는 여자로서는 더더욱 힘들기 짝이 없다. 농막은 들판 한가운데 있다.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더욱 추운 게 콘테이너다. 그래도 추운 게 낫다. 더우면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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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더운 날엔 일 마치고 아내하고 아이들하고 부근에 있는 금강대학교에 갑니다. 거기가 산 밑이라 바람이 불어요. 도서관에 에어컨도 있어 시원하고 책도 볼 수 있거든요.”
임씨는 집에 대해서, 땅에 대해서 욕심이 없다. 땅을 사서 집을 짓는다는 개념이 없다. 비록 빌린 땅이라 하더라도 내가 농사를 지으면 내 땅인 거고, 사는 곳이 곧 내 집이다 라는 생각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하고 공부도 잘 해주고 있어 자식들에 대한 걱정도 없다.
해마다 12월이 고비다. 이자도 갚아야 하고 지출할 데가 많아 쪼들리는 시기이다. 아내의 입에서 농사 접고 도시로 나가자는 얘기도 요맘때 간혹 나온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도 쑥 들어갔다.
수입이 떨어지면 아내의 말을 고려해 볼만도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오른다. 그런 희망을 아내에게 들려준다. 아내도 슬슬 농사 이력이 붙는 지 처음 내려왔을 때처럼 힘들어 하지는 않는다. 임씨는 아내에게 갈등할 것 같으면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내는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안내려올 여자가 아니었다.
“시골에서 도시에 맞추어 생활하려면 못 삽니다. 핸드폰도 죽여야 하고, 문화 생활도 접고 농사에만 매달려야 해요. 그래야 살아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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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묵묵히 따라와 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남자도 힘든 게 농사이다. 하물며 농사 같은 힘든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여자다. 농사는 혼자서는 힘들다. 제 때에 해주어야할 게 있다. 가령 정식 할 때 한 달 안에 하우스 6동을 다해야 하는데 아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부는 여가생활을 누릴 겨를이 없다. 하루 종일 일만 한다. 그래도 시골 생활이 도시 생활보다는 낫다. 임씨는 “농사도 재밌고, 생활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건강도 되찾았다고 한다.
농사는 정답이 없다. 100프로 보장도 안 된다. 기후가 돌변하거나 병이 오면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기술센터에서 문제점을 해결해주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가능하고 위안도 된다.
임씨는 2001년 논산 농업기술센터에서 조한규 자연농업 회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부터 자연농업에 관심이 많다. 당귀 계피 등 한약재에 막걸리를 넣고 한방영양제를 만들었다, 쑥 미나리 등으로 천혜녹즙도 담고, 기형 딸기에 설탕을 넣어 동자액도 만들었다. 골분, 혈분도 쓰고 토착미생물을 쌀겨에다가 발효시켜 토양관리도 하고 그런다. 작년에는 짚을 넣었고, 올해는 콩대 깻대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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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이런 일들을 누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딸기 재배는 까다로워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아 하면 한결 쉬울 듯도 한데 혼자 하려니 여간 고생이 아니다. 부근의 연산, 양촌 등지에 몇몇 자연농업 하는 이들이 있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찾지 않게 된다. 수출 딸기작목회 소속이지만 거기도 몇 번 안가니까 멀어졌다. 그곳은 관행으로 지어 잘 가지지가 않는다.
임씨는 방송통신대 농학과를 다닌다. 4년 과정 중 1학년이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학기 당 22만 원이라는 학비는 부담이 된다. 그렇지만 평생 농사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한다.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임씨는 딸기농사를 잘 짓는다는 곳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 눈으로 현장을 확인한다. 여름딸기가 나온다고 해서 강원도 봉평 쪽에도 가보았다.
“그곳은 서늘해서 여름 딸기가 되겠던데요. 보니까 충 피해가 심각하더군요. 제 꿈이 딸기 농사를 그림 같이 짓는 겁니다. 일년 사시사철 딸기를 수확하는 거에요. 투자 여유만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조만간 임창수 씨 소원대로 임씨의 농장에선 일년 동안 딸기 수확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임씨는 집과 땅에 대한 집착이 없으며, 오로지 딸기 공부에 올인하며 열심히 딸기 농사를 짓고 있으니까....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5.12.1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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