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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나 한 몸이 된 김기열. 전명란 씨 부부. 두 사람은 도시에서의 고단한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찾았다. 이들 부부에게서 듣는 결혼 이야기, 행복한 귀농 이야기.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노마진 직거래 장터 “자연몰”이 도시인들에게 인기이다. 유기농 과일서부터 친환경 화장품까지 다양한 무공해 상품들을 저렴하게 판매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자라뫼”라는 특이한 닉네임의 판매자가 있다. 작물도 색다르다. 미나리이다. 전화로 작물에 대한 문의를 하면 주로 부인(전명란 씨. 33세)이 받는다. 음성이 차분하고 맑고 고우며 말씨 또한 공손하기 그지없다. 어떤 여성일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자라뫼 홈페이지(www.jarame.co.kr)에는 자라뫼의 가족 사진이 있다. 전씨는 갸름한 얼굴선이 돋보이는 미인이다. 그녀의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편(김기열. 39세) 역시 활달하고 패기에 차 있는 호남형이다. 부부가 잘 어울린다. 자녀들도 건강하고 밝다. 두 사람이 홈페이지에 올린 자신들의 행복한 귀농이야기 첫 번째 글을 들여다보면 이들 부부를 만나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 정도이다.
“우리 부부는 99년 11월10일 저녁, 용달차 1대에 살림을 싣고 9개월 된 딸아이와 이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이 이 시골에 뭐 해먹을 것이 있나 도시가 더 살기는 낫지 않나 하시며 다들 한마디씩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들, 하루하루의 일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농한기 할일 없는 노인네들에게 재미난 얘기거리로 등장했습니다.
제일 좋아했던 분은 바로 아래 집 큰어머니였는데 항상 텅 비어 있는 우리 집을 볼 때면 낮에도 겁이 났는데 이웃이 생기니 좋다고 환하게 웃으셨던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난 12월 말, 전북 순창군에 위치한 김씨의 집으로 향했다. 부부는 트럭을 타고 순창 IC까지 기자를 마중 나왔다. 부부의 첫인상이 상상했던 대로였다. 어딘지 호감이 가는 친근한 느낌의 얼굴들이었다.
눈 덮인 논과 밭을 지나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인 마을로 들어섰다. 1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이다. 김씨 집은 골목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 맨 끝에 있는 회색 2층집이다. 시골집들 사이에서 눈에 띈다. 마을 어귀에서 그 집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였다.
거실에서 넓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앞산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씨 부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마을 이름이 재밌다는 말부터 꺼냈다.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우리 집 위치를 얘기할 때 대가리 맨꼭대기에 있다고 말하면 머리 위로 알아듣는 분도 있어요. 대동리란 마을하고 향가리란 마을에서 한 글자씩 따와 대가리가 된 거에요. 옛날에는 자라뫼라고 했어요. 마을 형세가 자라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지요. 마을 분들은 지금도 자라뫼라고 해요.”
김기열 씨의 말이다. 지금 사는 곳이 김씨의 고향이다. 중학교까지만 고향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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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영어학습지 선생을 잠깐 하다 그만 두고 친구와 함께 전주로 내려갔다. 모악산의 한 절에서 고시 공부를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우연히 전주식물원의 관상수 돌보는 일을 맡았다. 부인 전씨를 만난 건 이 무렵이었다.
전명란 씨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안양에서 성장했다.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다. 전씨는 밤에는 대학에서 건축설계학을 전공하고, 낮에는 설계사무소 일을 여러해 지속했다.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 여름방학을 이용, 보길도를 찾았다.
김씨는 여행을 좋아해 주말이면 배낭 하나 메고 길을 떠나곤 했다. 같은 시간 김씨도 보길도를 찾았다. 두 사람은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함께 탔다. 김씨의 기억.
“토말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보니까 이 사람이 한 쪽에서 책을 읽고 있더라고요. 눈길이 가지더군요.”
김씨는 배에서 내려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을 찾아가려고 했다. 마침 전씨도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김씨는 전씨의 뒤를 따라가 말을 붙였다. 당시 김씨의 외모는 파격적이었다.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하고, 검은 뿔테 안경에 위아래 블랙차림이었다. 전씨는 김씨의 행색을 보고 놀랐으나 목소리를 듣고는 안심이 됐다고 한다.
전씨는 “음성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겁낼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첫만남의 순간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섬에서 함께 지냈다.
“우리는 만난 그 날부터 2박3일을 같이 지냈어요. 물론 아무 일도 없었고요.”
김씨가 토를 달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랴. 두 사람은 마지막 배를 타고 보길도를 나와 완도에서 택시를 탔다. 전씨가 월출산을 보고 싶다고 해 두 사람은 그리고 향했다. 산 아래 널찍한 마루가 있는 음식점에서 두 사람은 닭요리를 시켜 먹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화엄사에서 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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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는 다음날 서울로 올라갔고 김씨는 부안 격포로 여행을 계속했다. 김씨는 헤어지면서 전씨의 연락처를 받아놓았다. 편지를 하겠다고 했다. 김씨가 답장을 주겠냐고 묻자 전씨는 편지를 받아보고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김씨는 그러나 바로 편지를 쓰지 못했다.
“격포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 돼 며칠 고생 하는 바람에 편지를 못 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제 편지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전씨는 편지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답장을 했다. 그 후 1년 반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씨의 부모도 김씨를 반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주에서 결혼했다. 전씨는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전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전주 동문사거리에서 화원을 했다. 그러나 전씨의 성격상 꽃집은 맞지가 않았다고 한다.
“제 성격이 외향적이라 손으로 아기자기하게 뭔가 만드는 걸 못해요. 꽃다발도 만들고, 리본 장식도 해야 하는데 그걸 영 못하는 거에요. 아마 설계도 그리면서 직선만 쭉쭉 긋던 습관이 몸에 배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가게도 잘 되지 않았다. 보증금은 집세로 까나가 한 푼도 남지 않았다. 6개월 만에 화원을 접었다. 트럭 하나만 달랑 남았다. 김씨는 아는 이의 소개로 용인의 입시학원에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학원버스를 운전하면서 학원장 소유의 개 농장과 양계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숙소도 콘테이너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만 마다할 수가 없었다. 김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험한 일을 하게 됐다.
“이 사람은 책이나 보고 글만 써와 한 번도 힘든 일을 안해봤어요. 못 하나 박지 못해요. 그런 사람이 수십 마리 개 먹이를 음식점에서 얻어다 끓여 주고 닭장 치우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전씨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농장 인부들의 밥을 해줘야 했다.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고생이 헛일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시골 생활의 전초인 셈이었다. 일종의 힘든 농사일의 연습이기도 했다. 월급 1백20만 원은 쓰지 않으니까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6개월을 더 버티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서였다.
“이렇게 힘들게 일할 바에야 우리 땅에서 우리 농사를 짓는 게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먼저 시골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냈어요.” 전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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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부는 99년 11월, 그렇게 해서 현재 사는 집으로 들어오게 됐다. 김씨는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으나 정작 김씨의 어머니가 동네 창피하다고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전씨는 그런 생각들이 편견이라고 잘라 말한다. 시골사람이든 도시사람이든 시골생활을 부끄러운 삶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시골이라면 늙어서 전원생활이나 하러 가는 곳, 젊은 사람들은 도시 생활의 실패 끝에 찾는 곳이라는 인식. 그런 것들이 하루빨리 젊은 사람들도 시골에서 할 일이 있고, 농사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시골 내려와서 점심 때 얻어먹은 상추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전날 밤에 내려와 짐 정리하고 우리 둘이 점심상을 차려 먹고 있었어요. 밑에 집 큰어머니께서 ‘아이고, 아무것도 없을 텐디, 뭐하고 먹는 디야!’하면서 상추를 깨끗이 씻어 쌈장까지 가져다 주셨어요. 그 날 상추가 왜 그리도 고소하고 맛 있던지요. 도시에서 사서 먹던 상추와는 질감도 틀리고 맛이 새로웠어요. 그 맛을 지금 내가 직접 키워 먹으며 느끼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전씨의 말이다.
김씨가 시골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시골흙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산뜻한 이층집을 지은 것이었다. 물론 전씨가 설계를 했다. 대지 150평에 1,2층 합쳐 건평이 28평이다. 1,500평 땅도 구입했다. 물론 군과 농협의 보조를 받았다. 집을 짓고 땅을 사는데 빌린 돈이 약 8천만 원이다.
벼농사 첫해인 2000년은 먹고 살 정도는 됐다. 하우스도 짓고 창고도 짓고 산에 고사리도 캐고 해서 그럭저럭 지냈다. 이듬해 2001년은 거름을 너무 주어 고추가 키만 크고 열매가 안 맺혔다. 2002년 고추 농사가 잘 됐는가 싶었는데 강물이 범람해 고추를 버렸다. 2003년 깨를 심었는데 또 섬진강물이 넘쳐 농사를 망쳤다. 2004년 벼농사와 고추 농사로 1,500여만 원을 벌어들였고, 올해 비로소 미나리와 벼농사로 2,500여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김씨 부부는 처음 관행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아버지의 땅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다. 제초제를 쓰면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니까 수확이 됐다. 그러나 재미가 없었다. 김씨는 우연히 “디지털농업”이라는 책자에서 자연농업을 접하게 됐다. 곧바로 괴산에서 자연농업 기본 연찬을 들었다. 전문연찬도 들었다. 듣고 보니 너무나 자신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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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우선 천혜녹즙부터 만들었다. 새벽에 섬진강둑에 나가 이슬 머금은 쑥을 따다가 설탕과 함께 항아리에 담았다. 숙성시킨 즙을 물과 희석해 밭에다 뿌리고 그 결과를 보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돈 주고 농약 사서 주는 거 하고 자기가 직접 자재를 만들어 숙성시켜 주는 거 하고 엄청난 차이가 났다고 한다.
“처음엔 어디다 써먹는 지도 모르고 만들었어요. 식물의 이화, 동화 작용도 모른 채 말이지요. 지금은 작물을 보면 500배를 희석할 지, 1000배를 희석할 지 압니다. 작물이 확실히 좋아지고 수확이 느니까 농사가 재미있어지는 거에요. 올해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고 내년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는 이들 부부를 이상한 눈초리를 보았다. 산에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구해다 녹즙을 만들어 뿌린다고 해서, 밭둑으로 작물 사이사이로 풀이 무성한데 제초제도 안친다고 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논에 피가 자라 씨를 퍼트려 논을 망가뜨린다는 이유로 남의 논 짓던 것도 포기해야 했다. 동네 소문에 김씨 어머니의 잔소리가 더해져 부부에게 스트레스가 됐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모임에 나오라 해도 안 나가고 일만 했어요. 4,5년 되니까 우리 작물이 남들과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해서 고추가 많이 열렸나하고 물어도 봐요. 처음엔 연찬 가라고 해도 안가더니만 우리 밭의 결실을 보고는 최근에는 군 지원을 받아 5명이나 갔습니다.”
김씨는 당시 연찬 교육 비용이 없어 빌려서 갔다. 그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김씨가 사는 자라뫼마을은 옛부터 미나리 농사를 지었다. 자라뫼의 미나리는 자연몰에서 인기 농산물 중 하나이다. 미나리를 먹어본 소비자들은 한결 같이 신선하고 향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줄기로 뻗어나가는 미나리는 백로 무렵에 파종하여 40여일의 성장과정을 거쳐 수확이 시작되어 구정 무렵까지 지속된다. 김씨는 섬진강 둑 밑에 미나리하우스 5동을 한다. 200평짜리 한 동에서 약 5백만 원의 수익을 올린다.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잘 돼야 그 정도 수익이 나요.” 전씨의 말이다.
김씨 부부는 미나리 외에 고추, 도라지도 한다. 도라지는 집 뒤에 약 150평을 짓는다. 그밖에 자광미, 검정참깨, 검정콩등을 자연농업 자재를 이용하여 소량 생산하였으나 올해 호응이 좋아 내년에는 조금 더 심어 볼 생각이다.
“지난번 미나리 무농약 인증을 받았을 때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여름미나리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형유통마켓에서 저희 농원과 계약을 맺는다고 해요. 미나리는 판로 걱정이 없어요. 부가가치도 높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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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부부는 과연 시골 생활에 얼마만큼의 행복을 느낄까.
“여름에는 새벽 4, 5시에 일어나 컴컴할 때 밭으로 나가 일하고 집으로 들어와 아침을 먹고 또 밭으로 나갑니다. 아내하고 늘 같이 하니까 어디 갔다 왔느냐고 싸울 일도 없고 좋아요. 물론 농사일하면서 의견 차이로 다툴 때도 있지만... 일하다가 뽀뽀도 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공연히 부끄럽게 한다는 의미로 전씨가 발로 김씨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전씨 역시 농사일이 힘들더라도 남편과 함께 있는 게 좋기만 하다. 시골 생활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도시의 문화 혜택보다 시골의 문화 혜택이 더 마음에 든다. 도시의 전시회가 시골에 다 있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자라는 풀과 나물들.... 좋은 옷, 좋은 음식, 편리한 물질보다 생명이 태어나서 크고 사라지는 그런 자연의 순환을 보는 데서 더 큰 만족을 얻는다고 한다.
"우리는 산에 올라 산나물을 따거나 자연농업 자재를 채취하러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해요."
김씨는 “자유가 좋다”고도 말했다. 구속 받지 않는 것, 출퇴근 안하는 것도 시골 생활의 장점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부부는 시골에서의 좋은 점은 무수히 많으나 단점은 단 한가지, 아이들의 통학 문제 뿐이라고 대답했다. 김씨 부부는 일곱 살, 네 살짜리 딸 둘을 두었다. 읍내까지는 어린이집 버스가 아이들을 데리러 오지만 마을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매일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데려오는 일이 시골 생활의 불편이라면 불편이라고. 자녀들이 크면 대안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김씨는 자연농업 하기 전에는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떡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개도 사육하고, 늘 초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농업을 하면서 땅속 미생물과 식물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시골에 살면서 제 자신이 많이 변했어요. 겸손해져야겠다는 걸 느낍니다. 욕심을 내지 말자, 남들이 농사 짓는 걸 보고 ‘나도 하면 똑같이 나오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땅은 그렇게 보답을 주지 않아요. 시골에선 일단 농사의 노하우를 알고 난 후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사실 집을 지은 것도 그런 점에서 후회가 돼요. 원래 있던 시골흙집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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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농산물은 자연몰과 자라뫼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된다. 자라뫼 홈페이지 관리는 전씨의 몫이다. 자라뫼의 미나리를 구입해 먹고 난 대부분의 도시 소비자들은 자라뫼 홈페이지에 맛있다는 댓글을 올린다. 전씨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열심히 농사짓는 걸 알아주는구나”하고 고마워하며, 동시에 농사의 보람도 느낀다. 자라뫼 단골 회원들이 어느덧 30여명에 이른 사실도 대견스럽기만 하다고.
전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희 홈페이지를 단순히 물건을 파는 수단이 아니라 적은 것이지만 우리부터 환경을 생각하는 싸이트로 키워보겠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농촌에서 폐비닐이나 제초제 등 농약으로 인한 환경 피해가 심각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청년 시절 문학도였던 김씨는 가슴 속에 작은 소망을 하나 갖고 있다. 청년 시절 습작으로만 그쳤던 시작 생활의 결실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간간이 섬진강둑을 뛰면서 머리가 맑아지고 영감이 떠오르면 시를 쓴다. 김씨의 집에서 산 하나 너머에 있는 합강이란 곳에 김씨의 선산땅이 조금 있다. 김씨는 그곳에 황토흙집을 짓고 논 800평에 자연농업으로 마음껏 농사를 지으며 시작을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이들 부부는 만약 도시에 그대로 남아 생활했다면 오늘과 같은 만족과 행복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5.12.3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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