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 퇴직하려면 마음대로 하세요.” 아내의 동의를 얻은 후 다음날 명예퇴직 신청하고 아내의 손을 잡고 시골로 찾아 들어간 전직 경찰공무원 김흥윤 씨. 평생 처음 황토집을 지으면서 겪은 맘 고생과 완공의 기쁨 그리고 여유 자적하는 행복한 시골 생활 1년 6개월 풀 스토리.
경남 하동에는 귀농인들이 많다. 해마다 늘고 있다. 이곳에 귀농인이 늘어나는 이유로 따뜻한 기후, 지리산 섬진강 등 아름다운 주변 경치, 녹차,감, 벼농사 등 풍부한 농산물 등을 들 수 있다.
하동에서도 화개면에 귀농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 가운데 집 때문에 유명해진 귀농인 부부가 있다. 2004년 7월, 인천에서 25년 경찰공무원 생활을 접고 들어온 김흥윤 씨(56세). 조영래 씨(48세) 부부가 바로 화제의 주인공들이다.
화개에 귀농한 이 치고 김씨의 집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는 집 완공 직후인 지난 10월 초, 마을 주민들과 친지들을 초대해 집들이 겸 지신밟기를 했다. 하객들은 그 날 저녁김씨의 집 처마 밑에 차려진 뷔페에서 산해진미로 배를 불리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에 춤을 추었다. 대도시에서 귀농한 이들 가운데 김씨처럼 풍성하고 정성스럽게 신고식을 치른 이도 드물 것이다.
김씨의 집이 화제가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집 짓는데 너무 애를 먹었다. 비용도 수월치 않게 들었다. 귀농인 답지 않게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것도 남다르다. 집들이 이후 김씨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과연 새집에 만족하고 있을까.
2005년이 며칠 남지 않은 지난 12월 27일 오후 3시 경, 김씨의 집을 찾았다. 그 유명한 화개의 벚꽃터널을 통과해 쌍계사를 오른편에 두고 산속으로 10여분을 달렸다. 왼편 산자락에 마을이 나타났다. 골목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자 넓은 공간에 김씨의 집이 보였다. 아담하고 포근해 보이는 기역자 형의 황토집이다. 집 안방의 창문을 통해 지리산자락이 훤히 내다보인다. 집 앞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감나무 몇 그루와 반듯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는 방금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매일 오후 2시~ 4시 사이, 쌍계사에서 3km 위에 있는 불일폭포를 운동 삼아 다녀온다고.
“칸트가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한 시각에 산책을 했듯이 저도 같은 시각에 산을 오릅니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게 너무 행복해요.”
불일폭포 휴게소에서 30년 가까이 찻집을 운영하는 지리산 지킴이가 있다. 김씨는 찻집 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신 후 산을 내려온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다. 토. 일요일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오르지 않는다. 김씨와 거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새집에서 사는 느낌부터 물었다.
|
-새집에 만족하세요?
“좋습니다. 우리 부부가 살기에 딱 알맞은 공간이에요. 창가에 앉아 하루 종일 산만 쳐다봐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김씨는 화개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착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강원도 쪽을 눈여겨보았다. 임계 쪽에 구체적으로 보아둔 땅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여름날의 폭우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아름답던 계곡이 산사태로 폐허가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겨울은 춥고 길었다. 눈길에 차가 빙그르르 돌아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강원도는 포기했다.
대신 따뜻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리산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종주를 해왔다. 친숙한 곳이다. 함안 쪽은 같은 지리산권이라도 더 춥다. 하동 악양으로 들어갔다. 그 곳 지인의 집에서 사흘간 지냈다. 물도 좋고 자연 환경도 다 맘에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썩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악양을 나와 화개로 들어갔다. 산장에서 며칠 지내보았다. 물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계곡 가까이에 살 집을 지어서는 절대 안 되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씨는 쌍계사 앞동네서도 살아보았다. 월세 15만 원짜리 집을 빌렸다. 인천에서 살림도구도 가져왔다. 그게 2004년 7월의 일이다. 11월 쯤 되자 추워 못살 지경이었다. 북향집이었다. 낮에는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관광촌이라 주민들은 하다못해 고사리라도 들고 나가 자판을 벌였다. 순박한 느낌도 덜했다. 집을 비워주었다.
김씨는 그 곳에서 한참 들어가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 사는 모암마을이었다.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빈집이 없었다. 김씨가 다니는 교회 목사의 여동생이 살던 집을 소개 받았다. 그 집에서 겨울을 났다. 그 사이에 빈집이 나왔다. 전형적인 일자형 시골집이었다. 마당과 집 다 합쳐서 40평 밖에 안됐다. 물론 텃밭도 없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2,400만 원. 평당 60만 원 꼴이다.
“마을이 마음에 들었어요. 집도 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주민들과 어울려 살면 외롭지 않을 거 같고, 빈집도 없고 해서 주저하지 않고 샀어요.”
김씨의 시골 생활에 대한 개념은 여느 도시 귀농인과 조금 다르다. 대부분이 마을과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김씨의 머리 속엔 아예 텃밭이 없다.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자연에 의탁해 편안하게 쉬면서 지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시골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원했다. 그런 면에선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농촌에 맞는 성격이라고 한다. 어려운 이를 보면 측은해 하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남들이 경찰로 보지 않았을 정도였다.
|
-집 짓는데 마음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황토집을 저렴하게 지을 수 없을까 해서 부지런히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여기저기 알아봤습니다. 마침 평당 2백만 원에 해주겠다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맡겼어요.”
2005년 4월15일의 일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다 김씨 마음 같지가 않았다. 김씨의 집을 지어주기로 한 도목수는 김씨 집 말고도 삼천포, 사천, 화개 등 여러 곳에 동시다발로 현장을 벌여놓았다. 달랑 직원 4명만 데리고. 도중에 가면 20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완공은 요원한데다 추가 비용까지 요구했다.
처음 계약서를 쓸 때 세부 사항을 자세히 적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김씨가 요구한 것은 집 크기와 비용, 완공 날짜 뿐이었다. 17평 규모의 황토집을 평당 2백만 원에 두 달 안에 짓는 것이 계약의 전부였다.
“그 사람이 감당 못할 짓을 한 거지요. 기둥용 목재를 가져왔을 때 다들 놀랐어요. S자로 한껏 휜 것을 가져왔습니다. 자기는 그런 걸 쓴다나요.”
착수금도 너무 많았다. 무려 2천만 원을 덥썩 내주었다. 결국 그 도목수는 서까래와 기둥만 세워놓고 손을 뗐다. 다른 현장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해 팀 자체가 분해됐다고 한다. 다행인지 도목수 밑에 있던 직원이 두 달에 500만 원을 받고 마무리를 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두 번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김씨가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몰딩 변기 타일 등 세부적인 것까지 관여했다. 김씨가 직접 구례에 나가 문짝과 창호를 사다주었다. 막판에는 김씨가 속한 인터넷 귀농 동호회 “오지를 꿈꾸는 사람들” 회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9월15일 완공을 보았다. 6월15일에 끝날 일이 석달이나 더 걸린 셈이다. 비용도 많이 추가됐다. 건축비를 3천5백만 원 예상하고 2천만 원은 여윳돈으로 남기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땅값까지 포함해 무려 8천만 원 가까이 든 셈이다.
|
“집 지으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다시 처음부터 새로 한다면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지을 수 있어요.”
김씨는 집을 짓기 전 반드시 집 짓는 공부를 한 후 손을 대라고 주의를 준다. 요즘 인터넷 상에 집 짓는 동호회를 포함해 집 짓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 많다. 그런 곳에 참여해 집 짓는 현장을 눈으로라도 지켜보고 난 후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가장 비용을 적게 들이는 방법은 도목수를 한 명 정하고 자재를 직접 구해다 주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계약 시에 세부사항을 꼼꼼히 적고, 착수금도 많이 줄 필요가 없어요.”
김씨는 지금도 손가락을 잘 펴지 못한다. 집을 짓다가 손가락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인대가 늘어나 쥐락펴락이 잘 안된다고.
“맘고생도 하고 몸까지 망치면서 힘들게 지었지만 다 짓고 나니까 보람도 느낍니다. 그런대로 만족해요. 다락방도 있고, 안방에 누워 창을 통해 건너편 산도 보고, 거실 창으로 손님이 오는 것도 알 수 있고요. 단지 창고가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 시골에 사니까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이 생기네요.”
김씨는 방 2개를 황토로 만들었다. 생각보다 황토가 많이 들었다. 5톤 트럭으로 3차나 들어갔다. 짓는 도중에 다락방도 냈다. 원래 설계엔 없는 것이었다. 앙증맞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으로 손님방, 그 위에 다락방이 있다. 오른편으로 다시 유리문을 열면 널찍한 거실이 나온다. 거실 한쪽에 싱크대와 조리대를 만들어 음식을 준비하며 가족들과 얘기를 할 수 있게 했다. 거실을 통해 안방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황토방이 나온다. 창호지를 바른 겉창을 열면 또 하나의 유리창이 나온다. 보온과 방범에 신경 썼다. 화장실도 도심의 아파트 못지 않은 위생감과 코지한 느낌을 갖도록 했다.
김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골에 집을 짓기 전 몇 가지 주의할 점을 들려주었다. 첫째가 ‘그 마을에 살아 보자’이다.
최소한 일 년 정도 그 마을에 살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을의 인심도 느껴보고, 해가 어디서 뜨고 어디로 지는지, 여름은 어떻고 겨울 날씨는 어떤지, 물은 잘 나오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보고 집을 지으라는 것이다. 겨울에 물이 안 나오는 곳이 태반이라고 한다.
|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과연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가”. 그 점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 순서라고 한다. 시골에서 아무리 마을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도 외지인은 영원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오랜 세월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온 그들은 한 집 건너 연결이 돼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혼자 6개월 간 버텨낼 수 있는가.
“그걸 못해서 다들 도망가는 겁니다. 번듯하게 집 지어놓고 그거 견디지 못하면 어떡해요. 시골에선 집도 잘 팔리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 김흥윤 씨는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한꺼번에 뒤엎는 새로운 얘기를 했다.
“만약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집을 짓지 않겠어요.”
집과 땅에 쓸 돈을 현금으로 지니고 있는 게 훨씬 낫다고 한다. 없으면서 모자라게 사는 것보다 있으면서 모자라게 사는 게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낫다는 것이다. 김씨의 말인즉슨 이렇다.
요즘 시골 어디를 가나 전세는 쉽게 얻는다. 한 달에 10만원 만 주면 쓸 만 한 집을 빌릴 수 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긴다. 주민들과 마찰이 생길 수도 있고,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이사 가고 싶기도 하고, 다시 도시로 나갈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런 경우 자기 소유의 집이 있다면 문제다.
“도시에서만 살던 나이 쉰이 넘은 부부가 시골에서 농사 짓는 일은 쉽지 않아요. 편안히 쉬려고 들어가는 겁니다. 집 지으면서 고생할 필요도 없어요. 부부가 살다 한쪽이 죽으면 열이면 열 모두 다시 도시로 나갑니다. 그때 어떻게 해요. 돈은 돈대로 물리고 집은 애물단지, 별장이 돼버리는 겁니다.”
|
시골은 생활비가 도시에 비해 훨씬 적게 든다는 점에서 김씨의 이 같은 말은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김씨 부부의 경우 기껏 해야 70만 원 내외라고 한다. 김씨는 거실 책상에 놓인 공과금 고지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 집을 보면, 승용차 기름값 10만 원 선, 전기세 2만 원, 인터넷 핸드폰 전화료 등 통신비 10만 원 선, 수돗세는 일 년에 1만 원, 쓰레기봉투 몇 천 원, 방 하나, 거실 하나 해서 난방비 10만 원, 부식비 10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그게 전부입니다. 옷도 살 필요가 없어요. 지금 있는 옷을 다 입고 죽으래도 못 죽어요. 부식비는 여름 같은 경우는 더 안 들어가잖아요. 주변이 온통 먹거리인데.”
만약 자신이 8천만 원이라는 돈을 집 짓는데 쓰지 않고 현금으로 들고 있었더라면 훨씬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웠을 것이라고 한다. 김씨는 현재 한 달에 1백만 원씩 나오는 경찰 연금으로 모자라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인천에서 태어나 고향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김씨는 어릴 적부터 시골생활을 동경했다. 추석 등 명절 때 고향을 찾아 가는 이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10시간이고 스무 시간 이고 갈 수만 있는 시골이 있었으면 했다. 김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서른 살에 경찰 공무원이 됐다. 시골에 대한 꿈을 가슴에 간직한 채 주말여행으로 전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경찰 공무원은 50세면 연금을 탈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됩니다. 그때까지만 일하고 시골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사이에 결혼도 했다. 다행히 아내도 시골을 좋아했다. 아내 조영래 씨는 충남 서산이 고향이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밤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다. 부부의 연이 잘 만난 것이다.
|
김씨 부부는 2004년 여름, 1박 2일 과정의 인터넷 귀농카페 전국 모임에 참가했다. 경남 하동 악양에 위치한 “자연을 닮은 사람들”(www.naturei.net)이 주최한 대규모 행사였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 사는 20대~50대 사이의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귀농 열망과 꿈을 안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귀농의 동기, 준비 과정 등을 털어놓으며 서로 얼굴을 익히고, 정보를 교환하고, 캠프파이어로 친목을 다지며 하룻밤을 보냈다. 김흥윤 씨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등 모임의 흥을 돋워 단연 인기였다.
다음날 하동에서 인천으로 올라가는 승용차 안에서 김씨의 아내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여보, 이제 퇴직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전날 밤 모임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남편의 얼굴에서 아내는 남편의 시골 생활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읽었던 것이리라. 아내는 때가 됐다는 것도 느꼈다고 한다.
“아내의 동의가 남자에게 힘이 되잖아요. 다음날 출근해 곧바로 명예퇴직 신청을 했어요. 쉰 살에 그만 두려고 했는데 쉰다섯에 냈으니까 5년을 더 근무한 셈이네요.”
당시 김씨는 경찰청 홈페이지에다 인상 깊은 퇴직의 변을 올렸다. 25년 간 무사히 가족을 부양하게 해준 경찰에 대한 고마움, 앞으로 삶의 계획도 밝힐 겸 해서 시를 올렸던 것이다. 중국 송대의 시인 도연명(365~425)의 “귀전원거”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 시는 그 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시는 다음과 같다.
귀전원거(歸田園居. 전원에 돌아와 살다)
少無適俗韻(소무적속운) 어려서부터 세속과 맞지 않고
性本愛丘山(성본애구산) 타고 나길 자연을 좋아했으나
誤落塵網中(오락진망중)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떨어져
一去三十年(일거삼십년) 어느덧 삼십 년이 흘러 버렸네
羈鳥戀舊林(기조연구림) 떠도는 새 옛 숲을 그리워하고
池魚思故淵(지어사고연) 연못 고기 옛 웅덩이 생각하듯이
開荒南野際(개황남야제) 남쪽들 가장자리 황무지 일구며
守拙歸園田(수졸귀원전) 본성대로 살려고 전원에 돌아왔네
方宅十餘畝(방택십여묘) 네모난 텃밭 여남은 이랑에
草屋八九間(초옥팔구간) 초가집은 여덟 아홉 간
楡柳蔭後첨(유류음후첨) 느릅나무 버드나무 뒤 처마를 덮고
桃李羅堂前(도리나당전) 복숭아 자두나무 당 앞에 늘어섰네
曖曖遠人村(애애원인촌) 아스라한 먼 곳에 인가가 있어
依依墟里煙(의의허리연) 아련히 마을 연기 피어 오르고
狗吠深巷中(구폐심항중) 동네 안에서는 개 짖는 소리
鷄鳴桑樹顚(계명상수전) 뽕나무 위에서는 닭 우는 소리
戶庭無盡雜(호정무진잡) 집안에는 번거로운 일이 없고
虛室有餘閒(허실유여한) 텅 빈 방안에는 한가함 있어
久在樊籠裏(구재번롱리)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다가
復得返自然(부득반자연) 이제야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도연명(陶淵明)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씨는 경찰관 출신답지 않게 낭만적이며, 사려 깊고, 풍유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흥이 나면 기타를 치며 몇 시간이고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와 얘기를 나누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진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그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위에 소개한 시는 비록 길지만 1천6백여 년 전 사람들은 시골생활의 의미를 과연 어디서 찾았는지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소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골생활을 꿈꾸는 심리상태와 이상향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김씨는 시골에 내려와 등산 외에는 규칙적으로 하는 일은 없다. 남들처럼 텃밭도 가꾸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내려온 것이다.
“방에 화분 하나 들여놓지 않아요. 쉬려고 내려 왔는데 텃밭을 가꾼다면 거기에 또 얽매이게 되잖아요. 그래서 마당도 없는 이 집을 산 거고요.”
그렇지만 한가할 때가 없다. 최근 그의 하루 일과를 보자.
2005년 12월 27일 귀농 교우의 생일 파티 참석
12월 28일 화개 대동회 참석. 술 마시고 기타를 쳤다.
12월 29일 모암마을, 화랑수, 개원마을 등 마을 3곳의 반장 뽑는 날. 술 마시고 기타를 쳤다.
내리 3일간 집을 비운 셈이다.
“대동회는 일 년에 한 번 연말에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상수도세도 내고 하는 마을 잔치에요. 요 며칠간 술 진탕 먹었어요. 죽었다 살아났어요.”
지난 봄에는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다. 차밭에서 차잎 따는 일이다. 하루 일당이 3만5천 원. 두 번 일해 7만 원을 벌기도 했다. 김씨는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인력이 부족한 농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다. 농촌에서는 50대도 젊은 편에 속한다.
|
김씨 부부는 요즘 시골생활의 여유와 한가로움을 맘껏 즐긴다. 덩달아 건강도 좋아졌다. 조영래 씨는 도시에선 특별히 아픈 곳이 없으면서도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내려오고 나서 활기를 되찾고 건강해졌다. 활발하게 몸을 움직인다.
김씨는 하루하루가 그냥 행복하기만 하다. 평생의 소원, 시골에서 사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산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르고 좋기만 하다고.
그런데 부부가 넓지 않은 방안에 24시간 함께 지내려니 답답한 구석도 있다. 그래서 부부는 번갈아 외출을 하는 식으로 서로 마주 보는 시간을 줄이는 꾀를 냈다. 오전에 아내가 먼저 등산을 다녀오면 오후에 김씨가 산을 오르는 식이다. 누구네 집에 행사가 있으면 아내가 먼저 가서 일을 도와주고 김씨는 나중에 간다.
김씨는 승용차를 타고 동네를 오르내릴 때도 빈차로 들어가지 않는다. 꼭 주민들을 태우고 다닌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역시 대화의 상대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농사 일을 알지 못하는 도시사람과 농민들 간에 공통적인 화제를 찾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김씨는 도시에서 귀농한 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나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도시와 시골의 문화 차이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풀 수가 있다.
기자가 김씨의 집을 방문한 날도 마침 귀농 교우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목사가 자신의 집에서 한 교우의 생일 파티를 조촐하게 열어 준 것이다. 이 날 파티엔 대학 교수, 청과상 중매인, 화장품회사 간부 등을 지내고 시골로 들어온 이들이 참석했다.
|
김씨 부부는 딸 하나를 두었다. 직장에 다니는 딸은 인천의 아파트에서 혼자 지낸다. 딸만 시집보내고 나면 부부는 어깨에 걸머진 세속의 무거운 짐은 다 내려놓는 셈이다. 그래도 인천의 집은 팔지 않을 거라고 한다. 돌아갈 곳을 남겨 두려는 마음에서다. 혹, 자식들과 살고 싶어 다시 인천에 올라갈 날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인천으로 올라가더라도 시골집은 팔지 않을 작정이다. 설사 내놓는다 하더라도 이런 집을 김씨가 생각하는 만큼의 돈을 주고 살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75세까지만 살면 돼요. 20년을 즐겁게 살고 그 후엔 이 집이 없어져도 좋고요.”
조씨는 머지않은 장래에 손자들이 시골집을 찾아와 할아버지와 함께 놀아준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며 웃어보였다.
김씨는 화개에 들어올 때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전원생활을 하자, 나까지 여기서 돈 벌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화개의 특산물-녹차 감 등을 도시의 친지들에게 소개하여 조금이나마 지역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자. 실제로 김씨의 몇몇 친지들은 김씨의 소개로 화개녹차를 애용하게 됐다고 한다.
김흥윤 씨는 도연명의 안빈낙도식 전원생활 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골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01.02 11:02
<저작권자 © 자닮,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