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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여고 교사직 끝으로 시골서 닭 키우는 선생님"교단에서 계사로..."

www.jadam.kr 2006-02-21 [ 오현주 ]
김계수 씨가 산란상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교사와 양계."

‘첼리스트와 된장’이란 제목이 떠오른다. 강원도에서 된장을 만들어 파는 어느 여자 첼리스트가 자신의 시골 생활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의 제목이 첼리스트와 된장이었다. 극 대칭, 언밸런스의 효과를 노린 제목이다. 그렇다면 교사와 양계는 어떤가. 첼리스트와 된장과는 다른, 아카데믹한 뉘앙스와 호기심을 안겨준다.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 교사였던 김계수 씨. 46세. 현재 직업은 농부. 5년 전 고향인 순천으로 들어가 닭1,500수를 키운다. 그는 왜 강단을 떠나 계사로 들어갔는가. 지난 2월 초, 그의 농장이 있는 전남 순천시 외서면 농소리를 찾아나섰다. 외서면은 낙안면 바로 옆이다. 낙안은 구면이다. 몇 번 찾아간 적이 있다. 낙안민속촌, 송광사, 주암호, 선암사를 가면 자연스레 낙안을 들르게 된다. 낙안에 다들 모여 있다.

순천 시내를 벗어나 벌교 여수 가는 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낙안민속읍성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지방도로 들어갔다. 구불구불 산길을 20여km 달리자 낙안읍성이 나타났다. 김씨에게 핸드폰을 했다.

“송광사 가는 길로 올라가다보면 고갯길이 나오고 그 고개를 내려오다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좌회전해 들어오면 거기가 농소리라는 마을입니다. 그리로 오면 돼요.”

산도 나무도 높았다. 고갯길이 심한 커브의 연속이다. 눈이 녹은 곳도 녹지 않은 곳도 다 미끄러웠다. 김씨는 어떻게 이곳을 넘나들며 달걀을 배달할까. 내리막길도 부분적으로 얼음판이다.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곧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좌회전해 들어가자마자 마을이었다.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려는데 김씨가 나타났다.

커다란 모자에 허름한 점퍼 차림. 장화를 신었다. 어디에도 교사의 티가 나지 않는다. 영락없는 농부였다. 모자를 눌러 써 얼굴이 잘 안보였다. 눈을 들여다보았다. 비로소 교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장을 오래한 눈빛이다. 육체노동만 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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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로 변신한 김계수 씨. 이제는 교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김씨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자기는 산 쪽으로 올라갔다. 우두커니 혼자 있기가 뭐해 뒤쫓아 올라갔다. 1백보도 걷지 않았다. 오른편에 계사가 나타났다. 닭들이 울어댔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닭똥 냄새도 나지 않은 듯했다. 수탉 한 마리가 계사 밖을 배회하고 있었지만 김씨는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멀리가지는 않았다.

김씨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계사의 칸마다 산란상자에서 달걀을 꺼내 문 앞에 놓은 후 한꺼번에 모아서 작업장으로 사용하는 마을회관으로 달걀들을 나르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 차가 계사까지 가지 못해 번거롭게 걸어서 날라야 했다. 오후에 달걀을 가지러 온다고 한다. 손님이 찾아와도 앉아서 편안히 맞이할 수가 없었다. 김씨는 계사와 마을회관을 서너 번 더 왔다 갔다 했다.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웬만하면 일을 끝낼 줄 알았는데 웬걸, 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금처럼 생긴 결정체를 깨부수고 있었다. “그게 뭔가요?” 하고 물었다. 된장 위에 이끼처럼 낀 소금이라고 한다. 일반 소금 대신 그걸 사료에 넣는다는 것이다. 또 기다렸다. 짬이 보인 듯해서 앉아서 얘기를 할 수 없느냐고 했다. 그제서야 김씨는 계사 옆 비닐하우스 안으로 안내했다. 닭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플래스틱 박스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마주 앉았다.

그는 모자를 벗고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과연 교사다웠다. 머릿속으로 그를 교단에 세워보았다. 선생님의 전형이었다. 고지식한 선생님, 학생들이 몸을 비틀어도 모른 척 하고 진도만 나가는 깐깐한 선생님, 그러나 순수하고 어딘지 다정다감한 구석도 엿보였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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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씨 부부는 같은 고향 친구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40여년을 함께 지낸 셈이다.

-어떻게 교사를 그만두게 됐습니까?

“90년대 말, 아이들이 바뀐 것 같았어요. 문화도 달라지고...대중 매체 영향도 있고, 청소년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등장하면서 아이들과 말이 안 통하는 거에요.”

그는 말을 신중히 했다. 쓸데없이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한마디씩 던지듯이 하는 말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전 한 번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은 계속 됐다.

“87년, 90년까지는 역사의 진보라든가 얘기가 가능했어요. 노동운동의 성격이, 고전적 의미의 진보가 타당성이 없어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졌어요. 교사 생활이 힘들더군요.”

그의 말을 녹취하지 않아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들이 있지만, 아무튼 그는 컴퓨터와 MP3를 귀에 매달고 사는 요즘 청소년들의 정서가 감당하기 힘들었던가 보다. 이런 말도 했다.

“저는 생태 쪽에 관심을 가졌어요. 제가 가르치는 사회 교과서 내용이 정치 경제로, 성장은 당연한데, 분배도 가르치지만... 저의 신념하고는 달라서 고민이 컸어요.”

자연 생태계를 지키고 싶은 선생이 고속 성장을 최고 가치로 두는 현대 사회의 속성을 아이들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현실- 그 모순과 강요의 교육 현장. 그런 것들을 묵살하고 가기에는 그는 너무 순수했고 정직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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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를 주고 있는 김씨. 자연농업으로 관리해 닭들이 튼튼했다.

김씨는 서울 성북구 정릉에 살았다. 그가 교단을 떠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서울 생활이 안 좋아서였다. 복잡하고 오염된 공기가 싫었다. 교단에서 마음이 떠난 그는 학교를 나오기 직전 귀농 준비를 하나씩 실천했다. 공동체도 견학가고, 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귀농학교도 다녔다. 처음엔 직업을 살릴 수 있는 쪽을 알아보았다. 대안학교 교사 자리였다. 귀농의 꿈도 이루고 신념대로 가르칠 수도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학교를 떠났다. 2000년 9월30일자로 사표를 냈다. 가을걷이에 맞추어서 일을 배우기 위해서 택한 날짜였다. 공무원은 50세부터 연금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참을 수 없었느냐고 묻자 김씨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다.”고 대답했다.

김씨의 아내(선현숙씨.46세)는 남편의 결정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이 힘들어 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시골 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김씨는 “결혼 초에도 수시로 집사람에게 시골 가서 농사짓겠다는 말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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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 넣을 소금을 빻고 있다. 일반소금이 아니라 된장소금이다.

김씨의 고향은 순천 외서면 구암리이다. 부인 선씨도 같은 순천이다. 현재 계사가 있는 농소리가 선씨의 고향이다. 김씨의 고향으로부터 4km 떨어졌다. 둘은 고향친구 사이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는 각각 순천과 벌교에서 다녔다. 둘은 편지 왕래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김씨는 초등학교 때 이미 선씨를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보았다고 말했다.

선씨의 기억에 어릴 적 김씨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선씨는 남편에 대해 “오래 겪어보니까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89년 결혼했다. 김씨는 대학을 나와 교사생활을 하다 중간에 군대를 갔다 온 후 다시 교단에 섰다. 그의 교사 경력은 16년이다.

김씨는 처음엔 고향에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일을 배우는 동안은 기거할 곳이 필요했다. 고향의 부모님이 계시는 집은 그것이 가능했다. 김씨는 고향 부근에서 자연농업으로 벼농사와 축산을 하는 한 농가에 기거하며 두 달간 일을 배웠다. 가족은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내려갔다. 당시 큰애가 초등학교 4년, 막내가 다섯 살이었다.

그는 농사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일을 잘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지게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김씨가 신세지는 농가의 주인은 김씨가 낫질 하는 걸 보고 당장 농사져도 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농사가 별로 힘들지 않더군요. 재미도 있고요.”

그러나 서울에 남은 가족은 힘들어했다. 특히 그의 어린 자녀들은 아빠를 보고 싶어 했다. 아이들이 아빠와 전화로 얘기를 하다가 보고 싶다고 울면 셋이 같이 울었다. 부인도 따라서 울었다. 아이들 때문이라도 더 이상 떨어져서 못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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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관리를 잘 한 덕에 닭들이 건강하게 알을 낳는다고 한다.

이듬해 2001년 2월, 가족이 내려왔다. 당시 김씨의 수중엔 퇴직금과 서울 전셋집에서 뽑은 돈 등 1억여 원이 있었다. 그의 귀농자금이었다. 순천 낙안면 동내리에 집을 얻었다.

귀농 첫해는 양계가 아니었다. 부모의 땅 1,200평에다 감자 무 벼농사를 지었다. 감자도 잘 됐다. 감자 130만 원 등 약 500만 원어치의 수확을 올렸다. 가톨릭 생협과 연결이 돼 판매도 가능했다.

이듬해 2002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양계를 시작했다. 양돈을 고려해봤지만 돼지는 체구가 크고 힘도 센 가축이라 다루기가 힘들었다. 축산 농가에서 돼지에게 주사를 놓다가 모지게 고생했던 기억도 있었다.

양계로 결정하게 된 동기는 귀농 전 경기도 화성의 한 양계 농장에 가본 경험 때문이었다. 야마기시농장이었다.

“닭들이 4만 수나 됐는데도 조용하고 냄새도 없었어요. 그 쪽에서 산란상자에 손을 넣어볼 기회를 주었어요. 닭들이 순하고 피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양계를 하기로 한 겁니다.”

김씨는 귀농학교에서 자연농업을 알게 됐다. 괴산에서 기본연찬을 받고 따로 축산 양계도 들었다. 계사는 자연농업으로 지었다. 자연농업 계사는 환기가 잘 되고, 횃대도 있고, 닭들이 충분히 뛰어놀 수 있는 공간도 여유롭다. 계사 건축비는 기초를 다진 위에 지을 경우 평당 15만 원이 든다. 김씨의 계사는 총 180평이다.

시작은 병아리 500마리로 했다. 한 마리당 600원씩 주고 샀다. 이후 병아리 값이 1,200원까지 뛰어올랐다가 조류독감 이후 2백 원이 내렸다고 한다. 3월에 짓고 5월에 넣었다. 김씨 스스로 “계사 바닥은 아주 잘 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대밭에 가서 부엽토 긁어다가 넣었다. 균사가 많았다. 밤나무낙엽, 왕겨, 볏짚도 넣었다. 충북 괴산 자연농업의 조한규 회장이 와서 보고는 “너무 두껍다”고 했을 정도라고.

“병아리는 폭 1m 되는 좁은 공간에 볏짚 썰은 거 깔아줍니다. 한 달 후에 해방시켜줍니다.”

현재 김씨의 계사엔 닭이 1,500마리가 있다. 그 중 병아리가 4백 마리이다. 한 칸(3.6m 8.25m)에 수탉 대여섯 마리, 암탉 80여 마리를 넣었다. 하루에 유정란이 8백 개가 나온다. 순천시내 아파트에 직거래 되고, 일부가 성당 생협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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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인 선현숙 씨는 "순천 미인"이다. 화장을 곱게 하고 일을 하고 있었다. 달걀도 배달한다.

-첫산란의 기쁨이 대단했지요?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걱정도 들었어요. 4개월만에 알을 낳았어요. 크기가 작았고 예상 보다 빨랐어요. 6개월을 생각하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가 부랴부랴 케이스 만들고 광고 전단지 돌리고 했어요.”

김씨는 순천 시내 아파트 문에 광고지를 붙였다. 1천 장 중 여덟 집에서 연락이 왔다. 일간지에도 광고지를 넣었다. 달랑 세 집에서 전화가 왔다. 힘든 과정이었다.

아내의 친지들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구매자를 넓혀갔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달걀을 배달하는 날이다. 금요일은 아내 선씨가 벌교 쪽으로 배달을 나간다.

첫해인 2003년에는 한 달에 150만~2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박스비 홍보비 사료비 등을 제외한 순수익이다. 이듬해는 200만 원, 작년에는 250만 원 선이었다. 요즘은 사료비로 한 달에 7천 원짜리 사료 8포가 들어간다.

김씨의 달걀 이름은 “달나무유정란”이다. 처음엔 이름 그대로 “김계수유정란”이라고 했다. 흔한 느낌을 준다고 해 버렸다. 달나무는 김씨가 지었다. 자기 이름도 연상되고, 달에 있는 나무라면 오염이 안됐을 거란 점이 어필할 것 같아서였다. 김씨는 “달나무, 좋지 않아요?”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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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계사가 있는 순천 외서면 농소리 풍경. 계사가 둘로 나뉘어져 있다. (사진은 아랫쪽 계사)

-닭은 어떻게 기르세요?

“핵심은 풀이에요. 논두렁의 다양한 풀들을 줍니다. 봄철에 거친 사료 많이 줘야 합니다. 병아리 때 잘 키워야 해요. 왕겨도 주고, 볏짚도 줍니다. 볏짚을 잘게 썰어서 주면 잘 먹어요. 닭이 볏짚 먹는다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산란상자 바닥에도 왕겨를 깔아놓습니다. 산란상자는 약한 놈의 도피처이기도 해요.”

사료는 시중에서 파는 기성사료 70%에 자가 사료를 섞는다. 자가 사료는 우리밀기울에다 삼화토, 된장소금 그리고 풀을 넣은 것이다. 삼화토는 황토, 소금, 석회가루를 섞은 것이다. 풀은 채소농사의 부산물이다. 여름에는 칡넝쿨을 넣어준다. 역시 잘 먹는다. 겨울에는 이탈리안라이그라스라는 풀을 준다. 이 풀은 소 키우는데도 많이 쓰는데 향도 좋고 닭들이 좋아한다. 늙은 호박하고 무를 주기도 한다. 고구마줄기와 잎도 잘 먹는다.

현미는 소화력을 회복시키는데 좋다고 한다. 이걸 현미식초 희석한 물에 24시간 불려서 준다. 김씨는 자연농업 자재도 뿌려준다. 한방영양제와 천혜녹즙을 밤마다 분무하고, 바닥에 뿌려준다. 숯가루를 사료에 섞어주고, 김치 담아서 그 물을 음용수에 넣어 주었다. 김칫물도 효력이 좋다고 한다.

처음 병아리 5백 마리 중에 10마리가 죽었다. 초보로서는 좋은 성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아프지 않고 잘 컸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게 겁 없이 시작했다. 최근에 닭들이 기관지염을 겪고 나서는 조심한다.

“창 관리가 중요합니다. 겨울에만 닫아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한여름에만 열어주어야 해요. 닭들이 감기가 걸려 두 달 동안 배달을 못했어요.”

조류독감은 걱정하지 않는다. 계사가 있는 지역이 철새가 적게 오고 주변에 농가가 많지 않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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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교사 생활 16년을 접고 시골로 들어왔다.

-도시 귀농인에게 양계는 어떤가요?

“양계는 적은 자본으로 시작이 가능하고, (돈) 회전도 빠릅니다. 좋은 점이 있어요. 그러나 처음에는 판로에 애를 먹어요. 그리고 매달려야 합니다. 너무 힘듭니다.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김씨도 양계가 성격에 맞는다고 한다. 변화를 싫어하고 한가지를 꾸준히 하는 걸 좋아한다.

-시골 생활이 좋습니까

“귀농 첫해는 행복했어요. 씨 뿌리고 자라는 걸 보는 기쁨이 큽니다. 서울에서 안사니까 좋고요. 전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혼자서 하는 걸 좋아해요. 소비자 하고 직접 만나는 것도 좋고요.”

시골에 살면서 술이 많이 늘었다. 서울에선 석 잔만 마시면 끝이었다. 요즘은 소주 2병까지도 마신다. 시골은 술에 관대하다. 사람을 사귀는데도 술만치 좋은 것이 없다며 웃었다.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의 빌라에 사는 김씨는 매일 아침 9시에 이곳 계사가 있는 마을로 넘어온다.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그의 생활은 물 넣어주고, 달걀 꺼내고, 사료 주고, 배달 나가는 일의 반복이다.

그래도 답답한 건 없다. 시골 생활의 보람 같은 건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몸 움직여서 뭔가 만들어내는 것이 좋을 뿐이다. 일 자체가 즐겁지 않으면 양계는 못할 일이라고 한다. 김씨는 교사의 꿈을 완전히 버린 걸까.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을까.

“제대로 된 학교에서 가르쳐보고 싶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동료들하고 대안학교를 알아봤어요. 실상사에서 대안중학교 과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자리가 났다면 그곳에 갔을 겁니다.”

김씨는 닭에 매여 산다. 하루도 계사를 떠나지 못한다. 부인 선씨는 여행을 좋아해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다녀오기도 한다. 김씨는 닭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고 싶지도 않다. 최근에 부부의 주례를 보아준 교수의 빈소에도 30분만 앉아 있다가 내려왔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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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혼자서 일 하는 걸 좋아한다.

부인 선씨는 시골 생활이 남편 같이 좋지만은 않다. 도시보다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적인 답답함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친지들이 많은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선씨도 시골에 내려온 첫해는 좋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감기 치레도 하지 않고 공기도 좋아서이다.

선씨는 학부모 활동도 하고, 순천 시내에 사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잡지도 구독하는 등 나름대로 바쁘게 살면서 답답함을 푼다.

김씨 부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큰아이를 담양의 대안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기숙사 시설이 돼 있다고 한다. 작은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닭 수를 늘릴 것이냐"고 묻자 김씨는 “뭔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성격”이라고 대답했다. 계사를 떠나며 김씨처럼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게 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현주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06.02.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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