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농부는 신안군 증도 옆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갯벌염전을 일구고,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소도 몇 마리 키웠다. 어릴 때부터 섬소년은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함께 했다. 부친이 중학교 때 돌아가시고는 어머니와 함께 농사짓고 공부했다. 홀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서 뭍으로 나와 학교를 다녔다. 전남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넥타이 메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한 지 두 해 반 만에 광주로 되돌아왔다.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 돌아온 이유다. 서울에 비하면 한참 작아도 광주도 큰 도시임에도 그런 말을 한다. 광주에서 천주교 광주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맡아서 4년 넘게 일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경호 농부에게 천주교는 인생행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학생 시절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할 당시 학생운동과 농활이 삶에 큰 의미가 있었다. 대학생 때 농활을 다니면서 지금 살고 있는 나주 노안면 노안성당을 자주 찾았다. 그런데 나중에 노안성당이 있는 마을에서 농사짓고 살게 되었다. 광주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하며 만난 아내의 외가가 노안성당이 있는 마을이었다. 귀농지를 정할 때 아내는 외가가 있던 노안면을 제안했다. 하느님이 예정한 삶이자 운명이라고 김경호 농부는 믿고 따랐다.
나주시 노안면 김경호 연구원이 사는 마을 |
피땀 흘려 농사지어 아들을 뭍으로 보내 대학까지 보내 놓았더니 어느 날 아들이 농사를 짓겠는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복장이 터졌다. "배야지가 따땃한갑다. 깨 팔아서 대학 보내 놨더니 농사짓겠다는 걸 보니.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 어머니는 속이 상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줄 자신이 있었다. 농사지은 첫해 농약과 비료 쓰지 않은 논을 어머니께 보여 드렸다. 평생 농사지으며 농약과 비료의 효과를 철저히 믿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이 새로운 농사의 길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2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한 '행복한 농사꾼'이자 마을의 중추인 농부로 인정받았다. 지난 12년을 돌아보는 김경호 농부의 마음은 어떨까? 생산과 판로가 안정되어 있는 점은 다행스럽지만 농사 외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 힘들다. 천연기념물 같은 젊은 농부는 농촌에서 농사일 외에 할 일이 많다. 그나마 마을 이장은 마을에서 10년 터울인 바로 윗 형님이 맡고 있어서 다행이다. 각종 마을 모임과 행사, 천주교 활동, 가톨릭농민회 활동, 아이가 다니는 학교운영위원회 활동 등 만해도 늘 바쁘다. 이 외에도 여러 활동이 더 있다. 도시생활에 비해 시골살이는 덜 바쁜 것이 매력인데, 맡고 있는 일이 많다보니 여유가 없다.
“외지에서 들어온 제가 이 마을에서 막내입니다. 여기 살던 젊은 사람들은 모두 외지로 나갔어요. 마을에서 바로 윗 형님이 저보다 열 살이나 많아요. 마을이 살려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해요. 그리고 마을에서 자란 아이들이 도시로 나가지 않아야 하죠. 제가 농사를 잘 지어서 아이에게 농사짓고 사는 것이 도시에 나가 사는 것보다 낫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가 농사꾼이 되기를 바라니까요.”
김경호 농부는 어머니의 희망과 반대를 무릅쓰고 농부의 길을 선택했다. 김경호 농부의 조상들이 모두 농부의 삶을 살았을 테니 수천년 농부의 가업을 잇는 몇 남지않은 농부다. 김경호 농부의 희망대로 초등학생인 아들이 자라서 ‘행복한 농사꾼’의 가업을 잇기를 소망해 본다.
- 동영상 보기 (14분)
일반화질
|
고화질
|
후원전용 (1회 무료시청 가능)
|
유문철 기자,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16.08.08 21:38
<저작권자 © 자닮,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경호#산란계#유정란#동물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