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가톨릭 사제로 2차 대전 직후 남미의 섬 푸에르토리코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중남미에서는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해방신학’이라 부르는 급진적인 좌파 신학이 생겨났고 이반 일리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톨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교황 요한 23세의 가톨릭 공의회가 열렸는데요.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던 전례를 뒤엎고 모든 주교들이 모여서 가톨릭 교리 전체를 다시 재검토했습니다. 이른바 제2차 공의회는 가톨릭의 진보적 교리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가톨릭이 보수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리치는 로마 교황청에 소환되어 사상재판을 받았습니다. 사제직을 박탈당하지 않았지만 일리치는 교회와 인연을 끊고 자유사상가로 활동했습니다. 7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사색의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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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치는 과학적 발견은 적어도 극단적인 두 방향으로 전혀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학의 첫 번째 방향은 기능의 전문화, 가치의 제도화, 권력의 집중을 가져오고 인간을 기계나 관료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킵니다. 두 번째 방향은 각 개인의 능력, 통제력, 창의력을 확장시켜서 원하는 만큼 힘과 자유를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두 번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적용될 때 두 번의 분수령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분수령은 과학기술이 인간이 그 전까지 겪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대표적인 것은 의학기술로 20세기 초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세균을 발견했고 이로써 결핵, 매독 등 그 동안 인간이 경험한 질병에 대한 치료가 급속도로 진전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분수령이 나타납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의학기술이 그 자체가 하나의 기계가 되었습니다. 의료기술이 퍼지니까 의사계층이 생겨나고 의사계층이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이 자본화되어 갑니다. 그렇게 되면 환자의 필요에 의해서, 사회가 필요해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조직의 필요에 의해 기술을 늘려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X-ray가 있는데도 CT가 발명되고, MRI가 발명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지는 의사들만 알 수 있습니다. 일리치가 말한 ‘병원이 병을 만드는 단계’가 됩니다. 의료기술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이 이런 발전단계를 거칩니다. 문제는 첫 번째 분수령 단계에서 인간이 기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바람직하게 기술을 채택해서 사용하는 상태를 일리치는 ‘공생성 conviviality’이라고 부릅니다. conviviality는 convive의 명사어로 연회, 잔치라는 뜻이고, convive는 ‘잔치에서 흥청거리며 놀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convivial이라는 단어가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술에 취해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하는 단어임을 나는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만취할 정도로 쓰는 게 아니라 알딸딸한 상태로, 서로 기분 좋을 정도로 쓴다는 의미입니다. 술을 알딸딸하게 마시는 것과 만취하는 것의 차이는 한계의 문제입니다. 기술에는 처음부터 몹쓸 성격을 갖고 있는 보드카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대표적이죠.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 자체를 거부하고 원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좀 더 분석적으로 말하면 기술은 세 가지 가치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첫째는 생존입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가. 둘째는 정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공생성’입니다. 알딸딸하게 함께 적당히 쓰는 것. 이 세 개의 가치를 충족시키면서 기술을 사용했을 때 인간이 기술로 인한 위기를 벗어나면서 그것을 오히려 인간의 해방 기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가치에 따라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는데 일리치는 이를 ‘근원적 독점 radical monopoly’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독점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산업 내의 여러 기업들 중 특정한 자본이 산업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산업 내의 거대자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맑스주의라면 일리치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독점으로 산업이 모든 개인에 대해 갑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옛날 조선시대의 한 마을에서 홍수가 나서 오직 다섯 가정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갑자기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문명이 멈춰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재조직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어느 쪽일까요 조선시대입니다. 왜냐면 조선시대는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미래세대를 키우는 등 한 사회의 평균적인 능력이 각 개인에게 그대로 체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의 능력 대부분을 산업 조직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보다 풍요롭고 인간의 잠재능력을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그 기업들이 사라지면 우리는 조선시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생존력이 취약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일리치의 사상이 맑스의 사상과 크게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맑스의 교리적 원칙은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이 심화되어서 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전시켜 놓은 생산력을 노동자가 접수해 새로운 사회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즉 맑스는 생산력이 곧 사회적 능력이라고 본 것이죠. 노동자들이 자본가로부터 사회적 능력인 생산력을 쟁취하면 이 생산력이 곧바로 사회적 능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리치는 사실 각 개인들은 과거에 비해 역량이 후퇴하고 자율성이 약해지고, 오히려 그런 상태 때문에 사회로부터 더 많이 지배 받는 상태, 다시 말해 맑스식의 설명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근본적 독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브랜드가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한 가지 유형의 생산물이 지배하는 상태다. 근본적인 독점은 산업생산의 과정이 절실한 필요의 충족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를 행사하며 비산업적인 활동을 경쟁에서 축출하는 상태다.” 근원적 독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비산업적인 활동을 삶에서 축출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24시간을 살더라도 산업적인 활동에 8-90%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공생적인 사회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도로만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가장 자율적인 활동을 하는 사회이다. 활동이 창조적인 정도만큼 단순히 쾌락이 아니라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도구가 어떤 지점 이상으로 증가해버리면 착취와 무력감이 생겨나고 자율성을 억제시킵니다. 따라서 그 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리치는 도를 넘지 않는 균형점을 ‘다차원적 균형’ 혹은 ‘다층적 균형’이라고 부릅니다. 생존을 위한 균형, 정의를 위한 균형, 공생성을 위한 균형이 각각 교차해서 균형되는 지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균형 때문에 병원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정의를 위한 균형 때문에 무상의료 같은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MRI를 무상의료로 한다고 해서 우리가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까지 던져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공생성을 위한 균형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다차원적 균형을 만들어내는 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균형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도 없습니다. 전문가가 그런 균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근원적 독점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여민주주의가 중요합니다. 물론 전문가도 낄 수 있지만 전문가는 참여자 중 한 사람이고, 전문가가 답을 주고 대중이 따르는 방식은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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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일리치의 근원적 비판은 병원과 교육에 대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전까지 교육과 의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 데 대해 일리치는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학교없는 사회>에서는 교육은 필요하지만 지금 모든 국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교육제도로는 교육의 목표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는 왜곡된 의료제도에 대해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서는 에너지와 효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74년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때에 쓰여진 책입니다. 물값보다 싸다고 생각했던 기름값이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 때였습니다. 그 동안 값싼 석유가 미국 자본주의를 버티는 힘이었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동사람들은 희생해야 하는 세계체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70년대에 산유국들이 석유생산량을 조절하겠다고 나서면서 서구경제가 무너졌습니다. 그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등장했죠. 자원의 문제가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눈으로 확인했고, 그때 선각자들이 이제까지와 같은 성장은 지속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리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고도의 에너지 사용량에 의해 사회의 붕괴가 시작되는 한계는 에너지의 전환이 물질적인 파괴를 낳는 한계와는 다르다. 마력으로 표시한다면 전자가 후자보다 분명히 낫다. 이것은 사회가 그 구성원에서 할당하는 1인당 에너지할당량을 정치적인 문제로 취급하기 이전에 이론적으로 인식해두어야 할 사실이다.”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이 생태적 문제, 물질적 파괴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사회적 파괴를 낳는 에너지 사용량이 물질적 파괴를 낳는 에너지 사용량보다 적다고 명시합니다. 사회의 파괴를 낳는 에너지 사용량이 1인당 50리터의 석유라고 하면 물질적 파괴를 낳는 에너지 사용량은 1인당 100리터, 즉 석유위기로 물질적 파괴를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지만 사회의 파괴는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따라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질적 파괴가 아니라 사회의 파괴입니다. “사회복지의 한계가 되는 1인당 전력 사용량은 아직 인류의 80%가 거기에만 의존하고 있는 마력을 훨씬 상회하지만 폭스바겐의 운전사가 조정하는 출력보다도 훨씬 낮은 범위 내에 있다” 근본생태주의자와 일리치가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인류의 80%가 사용하는 1인당 에너지량은 인간사회가 병들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사용량의 바람직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지만 폭스바겐 운전사는 이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80%는 1인당 바람직한 에너지 사용량에 도달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남반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안적인 발전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더 잘 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더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에너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산업이 교통입니다. 교통의 핵심은 ‘속도’입니다. 그래서 KTX가 생겼죠.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직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는 교통의 속도가 늘어나면서 우리 삶의 자율성이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속도가 인간에게 좋은 것인가 일리치는 자전거에서 힌트를 발견합니다. 자전거의 속도가 인간과 기술이 서로 어울리는, 서로 알딸딸하게 취하는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말이죠. 자동차의 동력장치가 석유고갈 문제를 일으키지만 자전거는 인간의 동력으로 움직이기에 에너지 문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극명하게 인간의 속도임을 말해주는 건 자전거와 사람이 부딪쳐서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할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을 자전거의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이반 일리치의 생각을 이어 받은 생태사회학자 앙드레 고르는 일리치와 맑스의 사상을 종합했습니다. 맑스는 발전된 생산력을 기반으로 자유시간 확보를 위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근본적인 목표였습니다. '필연의 왕국'이 살아가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영역이라면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이 필연의 왕국을 축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장 바깥에서, 기업 바깥에서의 시간을 최대화하는 것, 맑스의 노동해방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고르는 맑스의 생각을 이어 받아 일리치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령 자유시간이 아무리 늘어나도 매주 주말 마트에 가서 3-4시간을 보내야 하는 삶이라면은 맑스가 원하는 목표가 실현됐다고 하더라도 인간해방은 아닙니다. 자율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추진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자유시간을 확보하려는 생각조차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이건희를 쫓아내고 공정하게 투표해서 이건희와 똑 같은 의사결정을 하는 상황인 것이죠. 고르는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개인적인 자율성을 회복해 나가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회사에 나와서 임금노동을 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삶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어야 더 많은 급여보다 자기 삶의 자율성을 위해 활동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고르는 맑스의 문제의식과 일리치의 문제의식을 결합시켰습니다. 사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낼 때는 처음에 그 각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도달지점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우리의 상상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생각의 출발점을 일리치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강연일: 2013년 5월 16일 나눔 문화 : http://www.nanum.com
제공:나눔문화,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13.09.2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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