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청소년부터 어른들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 고민하는 주제, ‘배움’.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이 고민해 온 주제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평화나눔 아카데미 여덟번째 만남은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신 이원석님(문화비평가)은 “공부란 잘 망하는 법”이라고 말하는데요.
공부는 좋은'스승'과 '도반'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내고, 끝없이 반복하는 것.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잘 망해, 나만의 '다른 길'을 찾는 것.
그 공부의 여정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공부하면 보통 학교를 생각하는데, 저는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에게 강력한 훈육을 받았죠.
고등학교도 비슷했는데, 선생님이나 공부에 대한 기대치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싫어하는 저에게 남는 건 독서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첫날 서점에 가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집어 들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 서재에 있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읽었고,
수학여행 갔을 때 친구 녀석이 보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빅브라더와 오적의 모습을 봤고,
사회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 군도를 봤습니다.
제 주변에 친구들 모습은 <1984>의 스미스로, 이반 데니소비치로 보였습니다.
스미스는 죽는 순간까지 빅브라더를 사랑했고, 이반 데니소비치도 죽으면서
지난 10년 동안 날마다 행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수용소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전 힘들었습니다. 고민을 했죠. 이놈의 공부가 대체 뭘까.
뭔지 알아보려고 교육학 개론, 교육 철학, 교육 심리학까지 다 공부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비판적 교육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찾아낸 답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대 내내 내 인생의 선생은 어디 계실까 찾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누굴 만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뭘 하느냐가 중요하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공부에 대한 책을 덮고 고전에서 스승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앎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공부다"본래의 공부는 장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익숙해지는 것과 그 과정, 노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김용옥 선생님 말처럼 공부와 쿵푸는 음운론적 유사성뿐 아니라 의미론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쿵푸는 몸을 사용하는 달인이 되는 거죠.
이영걸의 소림사를 보면 배경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어갑니다. 주인공은 계속 훈련을 하죠.
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뀌어가고요. 그 시간 속에서 몸을 만들면서 달인이 됩니다.
그게 바로 공부의 의미입니다.
고대의 수학은 아주 실용적입니다. 학문이 아니라 산술로서의 기술, 치수하는 것이죠.
분명한 것은 아는 것과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미분 적분을 배우셨죠?
미분과 적분은 17세기에 기하학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에 기반한 것으로,
제대로 공부하면 세계를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하려면 삶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청소년 시절에 충분히 숙지하기가 어렵죠.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를 한다는 것은 영어권의 세계관과 전통,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어를 통해 영어권의 사유를 우리 안에 담게 되는 것이죠.
당연히 모든 언어가 그렇고요. 여러분은 영어를 공부하고 나서 어떤 내면의 변화가 있었나요?
없었죠. 진정한 공부는 우리의 내면을 바꾸고 세계를 확장시키고 자아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답을 외우기만 했지요.
교육을 성공의 방법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앎이 삶과 하나가 되고 내 존재를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유학은 학습(學習), 머리에 지식을 넣는 것(學)과, 몸으로 익히는 것(習)이 함께 했죠.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때때로 익히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때에 맞추어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습이 없죠.
유학자들은 같은 책을 기본으로 수천 번 읽습니다.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학에서의 공부는 습관을 바꾸는 데까지 갑니다.
습관은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패턴, 즉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인이 앞에 있을 때 생각을 합니다. 오늘 공부할 때 사람은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지.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 윤리학적 모색과 경제학적 사색을 하죠.
습관은 이런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죠.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합니다.
내 존재를 바꾸면 내 행위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스승과 삶을 함께하다 "이 공부의 개념은 철학의 발원지 고대 그리스 헬라에서도 행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철학은 고도로 사변적이지만,
원래는 추상적인 사유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입니다.
‘피에르 아도’라는 프랑스 고대 철학의 전문가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책을 썼는데,
‘삶의 방식’이 고대 철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적인 사변을 나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같이 살고 먹고 산책하면서 교육했습니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소피스트와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소피스트는 우리 시대로 말하면 토론하는 사람입니다.
토론은 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보통 제비뽑기를 해서 찬반을 정하고,
근거를 마련하고 공격해서 이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기서는 내가 주장하는 것과 내 존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내면의 신념과 발언하고 논쟁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았어요.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믿는 걸 위해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여했다면 그만큼 접대하고, 아니라면 너희들은 나를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다른 선택지인 벌금형을 거절합니다. 앎과 삶의 간격이 없었던 것이죠.
자신의 모든 걸 거는 용기를 보고 파레지아(parrhēsia) 라고 하는데 그 개념이 가장 투철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념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그의 걸출한 제자 한 명의 내면에 변화가 생깁니다.
플라톤입니다. 그는 아카데미아라는 교육기관에서 제자들에게 삶을 통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죠.
아카데미아는 기숙학원인데, 우리가 아는 기숙학원과는 물론 다릅니다.
같이 자고 같이 운동하고 산책하고 같이 밥을 먹습니다. 토론하고 술 마시고 같이 놉니다.
배움은 그 안에서 녹아 들어갑니다. 스승과 제자, 제자와 제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삶을 공유하고 스승의 삶을 답습한다는 것입니다.
머리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이 바뀌어야 네가 다 배웠구나 했죠.
그래서 기숙학원에 들어가면 10년은 기본으로 살았습니다.
중세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지식인은 왕과 귀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라틴어뿐만 아니라 자국어도 쓸 줄 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창과 칼이 있었죠.
중세 때 인문고전을 공부한 사람들은 수도사들입니다. 수도사에게는 조건이 있습니다.
인간의 대표적인 욕망 세 가지, 돈, 섹스, 권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재산 축적의 자유를 포기하는 청빈의 서약, 결혼하지 않겠다는 순결의 서약,
권력 행사의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복종의 서약을 했죠.
근본적 욕망을 포기한 사람들이 수도사가 되어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미사하고 오전에 일하죠.
그리고 잠깐의 공부의 시간이 주어지면 필경, 필사를 합니다.
공부의 대가는 썼습니다. 우리 시대라면 돈, 권력, 섹스를 포기하느니 공부를 하지 않겠죠.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고 배운 것을 삶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때의 공부는 기본적인 방향과 추구한 방향이 지금과 다릅니다.
일단 학습량이 굉장히 적었습니다.
주자 때 인쇄기술 덕분에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주자는 거기에 반기를 내겁니다.
몇 권을 읽는냐보다 몇 번을 읽느냐, 어떻게 읽느냐, 내가 어떻게 바뀌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스승과 도반, 함께 더 멀리 "공부를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스승과 친구입니다.
제 20대는 스승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승이 없지 않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숙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직접 뵙지는 못하나 책을 통해 멀리에서 가르침을 받고 내 삶에 되새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사숙의 방법은 고전을 통하는 것입니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책을 남겼죠.
고전에는 각 시대의 한계를 뚫고 우리시대까지 전해질만큼의 놀라운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시대의 자녀입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독주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죠.
하지만 우리가 플라톤의 한계를 보듯 플라톤이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의 고전은
우리의 한계를 보게 하기에 우리시대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치료제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스승을 따르고 본받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습은 반복하면서 내재화 시키는 것이잖아요.
고전을 읽을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고전을 빨리 읽고자 합니다.
그래서 네 삶이 바뀌었어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전을 공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특정한 몇 권의 책, 내 영혼의 고전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석학자 리쾨르(Paul Ricoeur)는 “고전이란 내가 읽는 책이 아니라 나를 읽는 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전을 내 삶과 내면, 과거를 샅샅이 훑어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읽어야 합니다.
가정, 사회에서의 원망, 상처, 욕망, 희망, 바람, 비전 - 모든 것이 응축된 내면을 끄집어내고
새롭게 질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고전을 제대로 읽은 겁니다.
그러나 고전만으로는 힘듭니다.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삶에서 모방하려 하겠지만, 세상의 중력이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우리에게는 도반(道伴)이 필요합니다. 나이, 기질이 달라도 상관없습니다.
같이 공부하고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고대 헬라 철학의 방법론은 변증법이죠. 변증법은 쉽게 말하면 대화술입니다.
변증법 dialectic에서 dia는 between, lectic은 ‘말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서로 대화하며 오고 가는 것 사이에서 뭔가 만들어집니다.
정正과 반反 사이에서 합合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플라톤은 철학을 하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는데,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스승들은 술의 힘을 압니다.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의 스승인 틸리히라는 사람은 20~30대였던 이 철학자들과
금요일 저녁마다 세미나를 했는데 술이 떨어지면 세미나가 종료되었습니다.
거기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온 겁니다. 대화를 통해 함께할 때 놀라운 길이 발생합니다.
나 혼자선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던 것이
대화하고 주고받는 속에서 발산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어떤 창조도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색채가 같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는 속에서 공부했던 고전이 묻어나게 됩니다."
세상과 사회의 기준으로부터 '잘 망하자' "그래서 뭘 위해서 공부할 것인가.
세상과 사회의 기준으로부터 망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명문대를 가라,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가라.
안 하려고 해도 강제적인 목소리들이 소리치잖아요.
그 소리에 맞추어 살아가야 안정을 느끼고, 성취해낼 때 타인의 인정을 받고 욕망을 충족합니다.
심어진 욕망은 눈 앞의 현실을 못 보게 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게 합니다.
공부의 목적은 여러분의 영혼을 만나고 목소리를 듣고 영혼의 욕망을 보는 데 있습니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모두가 북소리를 따라 한쪽으로 갈 때
나에게 들려오는 북소리를 따라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부는 사실 그러한 용기를 찾고자 함입니다.
사회에서 성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는 것이 공부의 본령입니다."
강연일: 2014년 5월 22일
나눔 문화 : http://www.nanum.com제공:나눔문화, 다른기사보기기사등록일시 : 2014.07.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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